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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 청혼시(詩)/시(詩) 2022. 9. 14. 16:48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그림 : 이금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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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례 - 괴산 장날 어물전에서 읽는 간고등어의 순애보시(詩)/시(詩) 2022. 9. 14. 16:43
저 자세는 너무 선정적이다 간 고등어 한 쌍이 뒤에서 뒤쪽을 깊이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아직도 몸에는 바다의 문양을 그려놓은 채 질퍽하게 따라 온 고향 꿈을 꾸는가보다 잠든 등 뒤에서 푸른 파도가 넘실거린다 여전히 등을 뒤덮는 파도소리에 왁자한 사람들의 흥정소리 다른 고기들의 목이 잘려나가는 칼질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수만리 타향으로 강제이주 당하면서도 물살을 가르던 정분을 잊지 못해 가슴에 품고 혹한 속에서 더더욱 몸을 밀착 시킨다 싱싱합니다 싱싱해 상인의 말을 꿈속으로 끌어당기며 (그림 : 김의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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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헌 - 밥상시(詩)/시(詩) 2022. 9. 14. 16:34
하루를 마친 가족들 밥상머리 둘러앉습니다 숟가락 네 개와 젓가락 네 벌 짝을 맞추듯 앉아 있는 이 가족 조촐합니다 밥상 위엔 밥그릇에 짝을 맞춘 국그릇과 오물주물 잘 무쳐낸 가지나물 신맛 나는 배추김치 나란히 한 벌로 누워 있는 새끼 조기 두 마리뿐입니다 변변한 찬거리 없어도 이 밥상, 숟가락과 젓가락이 바쁩니다 숟가락 제때 들 수 없는 바깥세상 시간을 쪼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자리에 둘러앉게 한 것은 모두 저 밥상의 힘이었을까요 어린 날 추억처럼 떠올려지는 옹기종기 저 모습, 참으로 입맛 도는 가족입니다 (그림 : 변응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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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하 - 밀물 썰물시(詩)/김완하 2022. 9. 6. 21:23
밀물이 그리울 때 있었다 둘러보아도 어디 빈 곳 없는 만조의 물이랑 앞에서 이렇게 가득한 게 생일까 묻던 때가 있었다 하늘과 바다 반반으로 닿아 서로를 여는 수평선 앞에서 나는 자주 파도에 젖곤 하였다 그 후, 가끔 썰물이 그리울 때 있었다 너와 나의 욕심 한순간 거두어 보내고 싶던 때 하루 한 번씩 비우고 채우는 바다처럼 나 깊어지고 싶을 때가 있었다 서해 갯벌의 발자국마다 간조 위에서 만조를 만조 위에서 간조를 그리워하던 내가 숨쉬고 있다 (그림 : 이금파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