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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형빈 - 당신의 이야기시(詩)/시(詩) 2022. 8. 23. 10:33
오늘 너에게로 들어가는 모든 문을 열어 놓는다 깊은 어둠을 더듬으며 한 뭉치의 적막을 짤랑거린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서 나다 추억의 관절 어디에도 없는 꿈들을 벗어 놓아야 한다 내 기억은 아침이 오기 전에는 치유될 수 없다는데 밤은 의문스런 별들을 지상에 던진다 길도 시간의 촉수를 세우며 느리게 걸어간다 강마저 지상의 뿌리를 찾아 흘러와서는 절름거리며 당신의 이야기로 깊어진다 사람이 가지 않는 곳마다 길은 돋아나고 나는 언제쯤 길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한 뭉치의 적막을 길 끝에 걸어놓고 너라는 길을 찾아, 나는 들어갈 수 없다 (그림 : 안기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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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윤 - 잔모래에 발을 묻고시(詩)/시(詩) 2022. 8. 23. 10:19
잔모래 속으로 가만히 발을 뻗는 저 여자, 사내의 얼굴이 사무친다 안개와 소금기에 얼굴을 씻고 한사코 수평선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그리움은 가시가 되어 고만고만한 아픔들을 가지 끝에 진분홍 눈물로 매달아 놓고 있다 가마우지 울음 귀를 적시면 기약 없이 흩뿌리는 저 환한 노을 황망히 바다로 떠나간 사내 해가 바뀌어도 돌아오지 않는데 종일 수평선에 눈 주는 저 여자, 먼바다 통통배 쪽으로 수신인 없는 눈먼 사연만 연신 날리고 있다 (그림 : 박영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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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 풀의 집시(詩)/시(詩) 2022. 8. 23. 10:12
사람 떠난 집은 폐가라 하지만 풀이 사라진 자리는 폐허라 하지 않는다 떠난 걸 눈치챈 적요만 나앉아서 바람을 믿고 기다리니 등불 없어도 풀씨는 돌아올 것이고 집은 아무것도 아니다 햇볕만 울타리로 세워놓고 마음 풀어 바람의 관통을 보는 저, 유순함 새소리가 지킨 것은 허공이지만 누워서 무게를 나누고 부드러움으로 아픔을 풀어가는 울음 없는 집 귀 없어도 듣고 있는지 보내지 않아도 때가 되면 떠나지만 환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내년에는 허공의 손을 잡고 새 목숨을 키울 것이다 시도해 볼 무엇 하나 자라지 못하는 곳은 집이 아니다 (그림 : 최광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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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용순 -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말들시(詩)/시(詩) 2022. 8. 21. 18:16
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누구도 기억이 없다 고슴도치처럼 누구도 가까이 오기를 꺼려했다는 것만 알 뿐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말들을 어떻게 내가 중얼거리게 되었는지 어떻게 뒤로 걷게 되었는지 누구도 설명할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뿌옇게만 보이는 세상 속에서 금요일의 노래를 누군가의 목소리를 처음 듣고 그 소리를 따라 왔지만 노래는 언제나 달아나고 깨어나면 금요일도 언제나 달아나 있었다 팔을 뻗어 잡아보고 싶은 금요일 이제 나의 노래를 불러보고 싶은 그런 날이다 (그림 : 이흥덕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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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규 - 화양연화시(詩)/시(詩) 2022. 8. 19. 20:31
바람이 불었다, 한겨울 철물점 천막처럼 반쯤 몸을 벗은 채 차갑게 울었다, 죽을 것처럼 상처를 주고받아도 우리는 미치지 않았고 사는 것처럼 살아남지도 못했다, 자고 나면 스무살 앳된 죽음마저도 함부로 버림받았다 뜨거운 문장을 뿌리고 꽃병을 잘 만들어도 우리가 하면 쓸모가 없어졌고 세상은 점점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눈멀고 버림받는 것도 식상해졌으므로 각자 숨어서 학대해온 슬픔들을 꺼내 밤새 함께 울다가 실컷 지치곤 했다 새파랗게 젊은 게 지겹다는 몇몇은 옥상에서 유성이 되거나 모터싸이클로 날아갔다 봄날도 연화도 제발 오지 말아달라고 사정하고, 와서는 가지 말라고 발악해도 '이 시간도 다 늙는다'는 걸 모르는 척 모두가 애를 썼다 모든 무정이 유정이 될 때까지 유정이 다시 무정이 될 때까지 타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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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설 - 기차 생각시(詩)/시(詩) 2022. 8. 17. 20:09
슬픈 생각을 따라가다보면 나는 기차가 되어 있다 몸이 길어지고 창문의 큰 눈이 밖으로 멀뚱히 뜨여 있다 나는 길고, 달리다 보면 창밖으로 식구들이 보인다 어쩌자고 식구들은 추운 민들레처럼 모여 플랫폼에서 국을 끓이고 있는지 내가 지나가는데도 나를 발견하지 못하여 기다리고만 있다 나는 슬픈 생각을 따라가다보면 네가 서 있는 곳을 지난다 풀지 않은 짐가방처럼 너는 늘 혼자다 내가 가려던 소실점 같기도 하고 신호등 같기도 한데 나는 너를 지나친다 그러면서도 너는 아주 많이 늙어서 내 할아버지만큼 오래 살아서 그런데도 네가 나의 사랑인 것을 쉽게 알아본다 슬픈 생각을 따라가다보면 친구들이 친구로 건너지 않는 건널목을 지나고 하늘이 파래서 조각조각 깨지는 어느 자오선의 가장 뜨겁고 아름다운 부근을 달리고 있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