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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 꽃잎 한 장시(詩)/강은교 2022. 8. 1. 21:44
꽃잎이 시들어 떨어지고서야 꽃을 보았습니다 꽃잎이 시들어 떨어지고서야 꽃을 창가로 끌고 왔습니다 꽃잎이 시들어 떨어지고서야 꽃을 마음 끝에 매달았습니다 꽃잎 한 장 창가에 여직 남아 있는 것은 내가 저 꽃을 마음따라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신이 창가에 여직 남아 있는 것은 당신이 나를 마음따라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흰 구름이 여직 창틀에 남아 흩날리는 것은 우리 서로 마음의 심연에 심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람 몹시 부는 날에도 (그림 : 한부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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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종금 - 완두콩, 살아가는 법시(詩)/시(詩) 2022. 8. 1. 21:39
여리다고 얕보지 마라 가늘다고 부러지랴 덩굴 손 맞잡고 하늘 우러르면 비바람 무섭겠느냐 실처럼 가늘어도 손잡고 출렁이면 쓰러지지 않아 부러지지 않아 바리케이트 치듯 손잡고 가는 게 우리들 살아가는 법 굽히는 삶보다 당당하게 맞서고 싶었냐 굽어져 타고 오르라는 둥그런 대 터널이 무색하다 설핏 지나는 바람결에 출렁다리 흔들리듯 위태해도 서로 몸 기대어 맞잡은 손 굳건해서일까 하늘 우러른 완두콩 줄기 사이사이 푸른 하늘 품은 완두콩 꿈꾸며 하얀 나비 닮은 콩꽃들 화들짝 일었다 (그림 : 문수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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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이숲 - 달팽이의 높이시(詩)/시(詩) 2022. 8. 1. 21:38
바닥에 사는 일은 터무니없이 넓은 지상을 지켜내는 방식이야 느린 것은 한 생애를 반추하기 좋은 춤의 동작이지 품새를 익히지 않아도 골똘해지면 생각은 마른침으로 쓸고 가는 한나절을 꽉 붙잡고 놓지 않는다 먼지 떨어진 바닥을 닦으면서 등을 지킬 때 한 생애는 장엄한 것 쉽사리 놓을 수 없는 것 활짝 펴지기 전까지 그것은 다만 등짐일 뿐 무거움으로부터 그녀는 저편을 꿈꾼다 몸을 뒤집으면 종이비행기가 될 거라고 확신하는 오늘도 짠맛이 풍기는 쪽으로 몰래 웃음을 부려 놓고 삶을 뒷발로 차듯 스쳐가는 바람아 투명한 점액질로 날갯짓하지 않아도 바람의 길을 따라 하구에 닿을 수 있는 세계를, 공중에 떠서 가고픈 한 시절을 꾹꾹 짊어지고 가는구나 캄캄한 피부를 보여줄 수 없어 동그랗게 움츠려드는 오후 햇살이 집중 포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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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다시 우미당을 위하여시(詩)/심재휘 2022. 7. 31. 22:47
갑자기 누군가가 당신의 등 뒤에서 부르는 것 같아 한번쯤 돌아보며 속아도 보고 싶다면 이제는 어떤 새벽의 빛도 가 닿지 못하는 꿈의 어둑한 저편에서 여전히 아침이면 피어나는 빵 굽는 냄새여 몇 번의 기억을 건너온 숨죽인 슬픔이여 아침마다 배달되는 삶은 지겹고 뜯어 먹는 하루로 매양 헛배만 부르다면 어느 날 문득 당신이 정말 맛있어지고 싶다면 멀고 먼 고향의 참 오래전 빵집 우미당 진열대에 놓인 갓 구운 그날들에게 잠시라도 몸을 묻으며 다시 한번 용서를 그리고 우리는 다시 오늘을 반죽하는 것이다 설익거나 타지 않도록 오븐 속의 인생을 보며 입 안에 번지는 눈물의 깊은 힘을 음미하기 위해 이제는 빵이 익기를 말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그 옛날 우미당 아저씨가 날마다 우리를 위해 그랬던 것처럼 (그림 : 임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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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 - 나날들시(詩)/시(詩) 2022. 7. 30. 21:54
우리는 초대장 없이 같은 숲에 모여들었다. 봄에는 나무들을 이리저리 옮겨 심어 시절의 문란을 풍미했고 여름에는 말과 과실을 바꿔 침묵이 동그랗게 잘 여물도록 했다. 가을에는 최선을 다해 혼기(婚期)로부터 달아났으며 겨울에는 인간의 발자국 아닌 것들이 난수표처럼 찍힌 눈밭을 헤맸다. 밤마다 각자의 사타구니에서 갓 구운 달빛을 꺼내 자랑하던 우리. 다시는 볼 수 없을 처녀 총각으로 헤어진 우리. 세월은 흐르고, 엽서 속 글자 수는 줄어들고, 불운과 행운의 차이는 사라져갔다. 이제 우리는 지친 노새처럼 노변에 앉아 쉬고 있다. 청춘을 제외한 나머지 생에 대해 우리는 너무 불충실하였다. 우리는 지금 여기가 아닌 곳에서만 안심한다. 이 세상에 없는 숲의 나날들을 그리워하며. (그림 : 이기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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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삼용 - 눈 내리는 성포항시(詩)/시(詩) 2022. 7. 29. 16:56
출항 등이 하얀 고깔모자 눌러쓴 채 육지로 돌아온 밤 함박눈은 전봇대에 흰 털옷 걸치고 목쉰 바람까지 음표 없는 음계를 전깃줄에 매달다가 길바닥에 굴러다닌다 생계를 물고 온 배들이 비린내를 흘리고 고양이 울음소리에 선창 가로등 쌍심지를 켜면 죽음을 저항하는 최후통첩을 보태며 부레 호흡 이어 가던 생선 아가미에 차오르는 선혈 막걸리 주전자처럼 찌그러들던 춘자의 생짜배기 18번도 디지털화된 반주기에 푸른 숫자판 되어 박힌 지금 수건으로 툴툴 털어내는 어깨 위 눈 부스러기 같은 선술집 안 버려진 추억마저 헐렁해지고 그때는 눈 오는 오늘 성포는 더더욱 적적하다 만 건너 가조도를 잇던 뱃길 대신 아치형 다리가 놓여 섬사람들이 흘리고 간 얘기들이 폐그물에 걸리는 밤 눈송이도 바닷속으로 투신하는데 닳고 닳아 희미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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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란 - 나는 아직 돌아오질 않았네시(詩)/시(詩) 2022. 7. 29. 16:55
이젠 돌려 달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만 돌아가겠다고 해야 하 나는 아직 내게 돌아오지 않았네 빛은 빛에게 그늘은 그늘에게 시간은 시간에게 돌아가 다시 빛나고 푸르고 소란스럽게 째깍이는데 나는 차마 묻지 못하겠네 왜 내가 돌아오지 않는지 왜 돌아갈 수 없는지 가끔의 너는 나를 구름 속 깊숙이 묻어 놓았다가 어느 날 문득 맑게 씻긴 말들을 건네며 나를 꺼내네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는 오래된 카페의 창가에 앉아 나를 기다리네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거나 음악도 없이 고개를 까닥이며 기다려도 오지 않는 나를 기다리네 초인종만 울리고 너라는 모퉁이에 잽싸게 숨어 버리는 나를 (그림 : 신제이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