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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환 - 그림자시(詩)/시(詩) 2022. 7. 25. 14:07
그리운 자가 그림자로 생각될 때 꿈속에서도 그림자를 따라다닌 적 있다 그늘과 그림자를 깨달았을 때 빛이 보인다는 걸 운명처럼 뒤늦게 알게 해 준 그림자와 그리운 자 사이 내 한쪽은 그리운 자였고 너의 한쪽이 그림자가 되어 서로 마주 보았던 계절 그림자가 좋아 빛이 달아준 그림자를 빛보다 융숭한 맑음이라 여기며 내 그리움과 너의 그림자 사이에 부는 호젓한 바람을 맞으며 우리가 다시 나팔을 분다고 할 때 꿈에서도 그림자만 따라다니는 일몰 근처에 내 한쪽을 다른 한쪽에 안겨주지 못하더라도 그리운 자, 그림자 사이로 보이는 비혹한 배경 그림자가 좋아 (그림 : 김현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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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천 - 고주랑 망태랑시(詩)/시(詩) 2022. 7. 24. 18:38
왜 이리 술맛이 좋은가 얼어붙은 겨울저녁, 저 혼자 돌이 된 사내, 그 사내 깨워서 술친구 만들어 주거니 받거니 잔술을 마시는 밤 왜 이리 술맛이 화끈한가 눈 내리는 겨울 하늘, 저 혼자 눈이 된 여자, 그 여자 불러서 눈 사람 만들고 너 한 잔 나 한 잔 병술을 마시는 밤 왜 이리 술맛이 푸근한가 하늘이불 둘러쓰고 내 안에 삭히는 누룩, 고주야 망태야 술친구 삼아서 별과 달 모두가 권주가 부르는 밤 왜 이리 감칠맛 나나 알음알이 다 버리니 나조차 내 이름 몰라 장자야 설두야 바둑아 호랑아 술태백 되어서 딴세상 만드는 밤 왜 이리 술맛이 나나 (그림 : 장용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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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호 - 늙은 색소폰 연주자시(詩)/시(詩) 2022. 7. 24. 18:33
한때는 텔레비젼에 잘 나왔다는 길옥윤과 색소폰을 불었다는 사람 황룡강 강가 그의 식당에서 오리탕을 시켜먹으며 듣는 색소폰 소리는 늙은 연주자의 비애가 아니다 한물 간 음악가의 향수가 아니다 쥬라기의 식물들이 퇴적하여 기름이 되듯 칠순의 세월과 생각이 타올라 때로는 깊은 달밤의 묵상이었다가 때로는 멱살을 잡고 흔드는 뜨거운 휘발유였다가 마침내 나를 자지러지게 하는 것인데 그의 생(生)과 같이 해 온 내 밥상에 놓인 오리탕과 김치와 콩나물이 저렇듯 기막힌 소리가 될 수 있다니! 아직도 나는 그것이 궁금한 것이다. (그림 : 임재훈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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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희 - 아름다운 비명시(詩)/시(詩) 2022. 7. 24. 16:55
바닷가에 앉아서 파도 소리에만 귀 기울여 본 사람은 안다 한 번도 같은 소리 아니라는 거 그저 몸 뒤척이는 소리 아니라는 거 바다의 절체절명, 그 처절한 비명이 파도 소리라는 거 깊은 물은 소리 내지 않는다고 야멸치게 말하는 사람아 생의 바깥으로 어이없이 떠밀려 나가본 적 있는가 생의 막다른 벽에 사정없이 곤두박질쳐 본 적 있는가 소리 지르지 못하는 깊은 물이 어쩌면 더 처절한 비명인지도 몰라 깊은 어둠 속 온갖 불화의 잡풀에 마음 묶이고 발목 잡혀서 파도칠 수 없었다고 큰소리 내지 못했다고 차라리 변명하라 바다가 아름다운 것은 저 파도 소리 때문인 것을 너를 사랑하는 이유도 그러하다 (그림 : 이현경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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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무산 - 내가 계절이다시(詩)/시(詩) 2022. 7. 24. 16:52
여름이 가고 계절이 바뀌면 숲에 사는 것들 모두 몸을 바꾼다 잎을 떨구고 털을 갈고 색깔을 새로 입힌다 새들도 개구리도 뱀들도 모두 카멜레온이 된다 흙빛으로 가랑잎 색깔로 자신을 감춘다 나도 머리가 희어진다 나이도 천천히 묽어진다 먼지에도 숨을 수 있도록 바람에도 나를 감출 수 있도록 그러나 이것은 위장이다 내가 나를 위장할 뿐이다 나는 언제나 고요 속에 온전히 있다 봄을 기다리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고 죽는 건 가죽과 빛깔이다 나는 계절 따라 생멸하지 않는다 내가 계절이다 늙지 마라 어둠도 태어난다 (그림 : 박영규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