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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은실 - 여름의 무릎시(詩)/시(詩) 2022. 7. 14. 23:48
능소가 피었던가 그날 자귀나무는 폭죽 같은 꽃들을 터뜨렸던가 향기로운 언어들로 흐드러진 여름이었다 당신이 오지 않을까봐 꿈에도 발목이 젖었던 밤들 보내고 돌아와 울 때 내 들썩임에도 떨어지던 꽃잎 무릎을 꺾어본 자만이 바닥을 알 수 있다고 당신은 가방에서 구겨진 꽃을 건넨다 다시 무릎을 굽혀 신발끈을 매어준다 무릎을 접고 앉아 등을 내어준다 신이 인간의 무릎에 두 개의 반달을 숨겨둔 이유 엎드려 서로의 죄를 닦아내는 일 정원을 가꾸는 일 무릎 속에 뜬 달 이지러질 때까지 대지에 무릎을 꿇고 (그림 : 이금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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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삼용 - 부산역시(詩)/시(詩) 2022. 7. 13. 09:43
갈 길이 막혀 기적조차 토하지 못한 열차를 부산항 파도가 소리로 대신 울고 나도 따라 울고 싶어 바다에 너의 이름을 던진다 종착역이란 지칭만으로 헛헛할 이곳에 나는 남고 너는 떠난 후 기억에 절여진 황홀로 하여 내가 아픈 지금이다 떠나든 돌아오던 갈 길 다른 뭇 걸음들 사이에서 한 사람 잊기 위해 내 생각 전부를 털어버린대도 비겁자란 낙인은 찍지마라 눈물이 먼저 번진 이름 싣고 떠나는 기차기에 이젠 미련 따윈 가차 없이 놓을게 사랑놀이 서툰자라면 다시는 찾지 마라 바다에 중독된 이별 잦은 부산역을 (그림 : 허필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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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정 - 하행선시(詩)/시(詩) 2022. 7. 12. 15:04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춥고 배고픈 밤일수록 열차는 더디 오고 더러는 바람 부는 길모퉁이 생업의 풀뿌리로 떨고 있거나 더러는 눈도 비도 되지 못한 이 겨울의 진눈깨비로 날릴지라도 약속된 불빛을 기다리며 묵묵히 철로 위의 침묵을 견디어낼 때 잃어버린 집결지를 찾아들듯 녹슨 포복으로 열차는 오고 그 나지막한 흔들림과 흔들림 사이 삶은 또한 서둘러 슬픔의 마지막 한방울까지 지우라 하네 기다림의 끝은 무엇이어야 하나 열차에 발을 올려놓으며 잊지 않았다는 듯 뒤돌아보는 (그림 : 김지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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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월언 - 심연(深淵)시(詩)/시(詩) 2022. 7. 12. 14:32
방법이라는 것이 동나면 좋겠어요, 모든 것을 시간에 맡길 수 있잖아요? 어떤 서두름도 없이 검은 머리가 흰머리로 변해가는 모습을 카메라처럼 바라볼 수 있지 않겠어요! 그리하여, 검은 머리가 흰머리로 되고 마는 것만 남는 세상 속에 있게 되겠죠. 아무런 평가 없이 다음이 오고, 갈등 없는 현상이 존재가 되는 시간이 흐르는 세계가 있을 거예요. 자, 이제 그만두죠. 간단한 각종 방법들 그만 사용하죠. 여기가 거기라는 것을 알기가 깊은 바닷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어려워지고 말았잖아요? 심연(深淵) : 빠져나오기 어려운 곤욕이나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그림 : 이정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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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숙 - 난독(難讀)의 시간시(詩)/시(詩) 2022. 7. 11. 14:31
보이지 않던 마음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자 수렁같이 깊었던 내 난독의 씨실 날실이 돋을새김으로 드러난다 헤아리지 못한 마음들 제대로 읽지 못한 생각들 외면의 차가운 순간이 살아나 심장 안쪽을 깊숙이 찌르고 비척비척 홀로 걸어갔을 쓸쓸한 걸음들이 내 안으로 다시 걸어 들어오는 저녁 깊이 읽혀지는 것이 많아지자 비로소 보이는 칠흑 같던 내 난독의 시간 지워질 수 없는 시간의 무게에 휘청, 가슴 저미며 파고드는 뜨거운 뒷모습의 부답(不答) (그림 : 박지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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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7월은 치자꽃 향기속에시(詩)/이해인 2022. 7. 10. 17:09
7월은 나에게 치자꽃 향기를 들고 옵니다. 하얗게 피었다가 질 때는 조용히 노란빛으로 떨어지는 꽃은 지면서도 울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것일 테지요.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내가 모든 사람들을 꽃을 만나듯이 대할 수 있다면 그가 지닌 향기를 처음 발견한 날의 기쁨을 되새기며 설렐 수 있다면 어쩌면 마지막으로 그 향기를 맡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꽃밭이 될 테지요. 7월의 편지 대신 하얀 치자꽃 한 송이 당신께 보내는 오늘 내 마음의 향기도 받으시고 조그만 사랑을 많이 만들어 향기로운 나날 이루십시오. (그림 : 윤명희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