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
김미연 - 새벽 두 시의 서재시(詩)/시(詩) 2022. 7. 6. 16:19
칸칸이 꽂힌 저 정적, 책상에, 연필꽂이에, 빈 의자에 정적이 앉아있다 한낮에 책장을 넘기던 소리도 찻물을 끓이던 주전자도 고요하다 새벽이 침묵을 물고 활개를 치며 거닐고 있다 잊혔던 실핏줄에 혈액이 돌고 시간은 어둠의 뼈를 타고 흐른다 벽과 벽 사이 실금이 가던 소리도 잠잠하고 꽃병에 갇힌 꽃의 숨소리도 멈췄다 의자에 기대어 고뇌하던 시간도 바닥에 엎드렸는데 서재는 익숙한 손님인 듯 침묵을 껴안고 금요일은 반쯤 지워졌다 벗어둔 낮의 껍질을 옷걸이가 붙잡고 있다 (그림 : 한휘건 화백)
-
이정록 - 호박고지시(詩)/이정록 2022. 7. 5. 16:32
호박벌이나 호랑나비의 크기를 생각하면 호박꽃이 너무 커다랗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애호박 일곱 개에 늙은 호박 두 개뿐이라고 생각하면 호박덩굴이 참 기다랗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울타리에 주렁주렁 매달린 호박고지를 생각하면 호박꽃은 더 크게 웃어도 되고 호박덩굴은 아랫마을까지 열 바퀴쯤 돌고 돌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호박전, 호박찜, 호박김치, 호박범벅 호박죽, 호박엿, 호박지짐이, 호박오가리, 청둥호박나물, 호박 된장찌개를 다 늘어놓고 호박 음악대를 만들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늙은 호박 속에서 겨우내 호박 등 밝히고 만화책이나 읽으며 호박씨나 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 : 이재숙 화백)
-
유병록 - 최선을 다해서시(詩)/시(詩) 2022. 7. 4. 20:02
잠이 오지 않는다 낮에 있었던 일이 자꾸 떠오른다 잊어버리면 그만일 텐데 아무도 모르는 잘못과 남들도 아는 실수가 생각난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그런 뜻으로 한 이야기가 아닌데 혹시 다른 사람이 오해하는 것은 아닌지 마음 쓰이는 말이 생각난다 정말 잠들어야 하는데 내일 잊지 말고 꼭 해야 하는 일들이 하나씩 자꾸 생각난다 핸드폰 메모장에 적어두지만 또 다른 게 생각난다 핸드폰 메모장에 적어둔 걸 잊어버리면 어쩌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자자, 자자, 이제는 정말 잠들자 내일 출근해서 일을 제대로 하려면 푹 자고 일어나야 한다 최선을 다해서 잠들자 이것도 중요한 업무라고 생각하면 조금 편안해진다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림 : 이준옥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