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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 - 7월시(詩)/시(詩) 2022. 7. 2. 20:41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림 : 권대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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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정 - 낙산(駱山)시(詩)/시(詩) 2022. 7. 2. 20:28
혜화동성당 십자가를 뒤로 하고 좁은 골목길을 오른다. 낮은 집들은 벌써 어둑하고 저녁볕은 계단 끝으로 몰려간다. 성곽의 거무스름해진 돌들이 새로 쌓은 돌을 묵묵히 받치고 있다. 맨몸으로 돌덩이를 져 나른 사람들을 생각한다. 앞서가는 노인은 석양빛도 무거운지 등이 굽었다. 돌 틈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새 떼가 고요를 털고 날아오른다. 낙산길 가파른 담벼락을 따라 풍화되지 않는 긴 그림자가 내려온다. 낙산(駱山) : 서울특별시 종로구·동대문구·성북구에 걸쳐 있는 산. 산의 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아 낙타산 또는 낙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양도성의 동산(東山)에 해당하여 서쪽의 인왕산(仁旺山)에 대치되는 산이다.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졌다. (그림 : 임진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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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위훈 - 갯땅쇠가 천민이다시(詩)/시(詩) 2022. 7. 1. 16:01
갯벌은 바닥을 딛고 설 무진장 텃밭 물때만큼이나 멀어져 비루해진 생의 간극은 내내 지고 가야 할 업장이거나 노 없이 건너야 할 삼도천이거나 발목 빠진 뻘장화의 안간힘 같은 거였다 땀방울마저 벼리는 갯바람 둘둘 말아 허리춤에 괸 해당화, 씨방 그 단단한 묵음은 아프락사스다 꺼지지 않는 물불 삭이며 천민(賤民)의 슬하라 자처하는 갯땅쇠 물결의 호흡 같은 겹겹 주름평야 일궜다 허공의 처음이 바닥에서 시작된 것처럼 달의 짓무른 아가미가 누겁의 숨결로 빚은 거기, 새랍 너머 뻘밭은 영원의 포대기다 살아 허물 많아도 내남없이 품다보면 그 허물 연되어 멀어진 당신과 나, 연리지같이 친친 이어줄 것 같다 다름과 너나들이한다는 건 거 있잖여, 아따 그냥반 말여 당신, 무고혀 벼랑 끝으로 내몬 그 숭한 이, 멍가슴에 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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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위훈 - 난젖시(詩)/시(詩) 2022. 7. 1. 12:57
매운 기억마저 얼어붙는 삼동 빈 가지가 쥔 여남은 모과는 향기에 기대 겨울을 쇠고 이내 자욱한 산으로 올라간 주인냥반 안개 낀 샛강 줄기처럼 가뭇없다 한도 삭히면 약이 되듯 칠백 평 고추 농사에 개먹은 한숨이 성긴 주름을 풀어 부르튼 입술을 시침질했다 닳아 짓물러 희미한 당좌(撞座)의 연꽃이 자늑자늑 소리의 보폭을 넓혀가듯이 때 절은 치맛자락을 타고 오르던 여린 넌출들 살아야 했다 나무도마의 패인 자국이 골 깊은 주름으로 눕는 밤 마름의 유세 같은 공공근로의 곱은 하루에 난젖 두어 자밤 올려 허기를 비비면 청상의 날들도 봇물 넘치듯 흘러갔다는 안동할매, 정지에서 생태 다지는 소리가 조왕신을 부르는 것 같다 틀어진 돌쩌귀처럼 바람 숭숭 들던 무릎걸음 소릴 듣고 혹여 젊은 주인냥반 찾아올까 서걱대는 서숙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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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미 - 인형에게서 온 편지시(詩)/시(詩) 2022. 7. 1. 12:47
조그맣게 살면 돼. 조그맣게 웃고 조그맣게 울면 돼. 조그만 옷을 벗고 조그만 집에 들어가 물뿌리개만 한 샤워기 아래서 콩나물처럼 흠뻑 젖으며 샤워를 해. 조그만 침대에 누워 조그 맣게 노래를 불러. 조그만 창문에 들어온 콩알 같은 달. 나는 조그만 목소리로 조그만 시를 낭독하고 조그만 이불을 덮고 자. 조그맣게 걱정하고 조그맣게 한숨 쉬고 조그맣게 생각하고 조그맣게 꿈꾸고 조그맣게 만나고 조그맣게 사랑하고 조그맣게 싸우고 조그맣게 화해해. 나 는 한 뼘짜리 인형이니까. 가볍게 걸어가고 가볍게 춤추고 사소하게 고민하고 사소하게 부대 껴. 그런데도 더 작아지는 연습을 해. 더 작은 웃음, 더 작은 눈물, 더 작은 시간, 더 작은 밥, 더 작은 세계에 갈 거거든. 쉽게 들어올 수 있지만 당신이 들어오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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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설야 - 겨울의 감정시(詩)/시(詩) 2022. 6. 29. 21:04
당신이 오기로 한 골목마다 폭설로 길이 막혔다 딱 한번 당신에게 반짝이는 눈의 영혼을 주고 싶었다 가슴 찔리는 얼음의 영혼도 함께 주고 싶었다 그 얼음의 뾰족한 끝으로 내가 먼저 찔리고 싶었다 눈물도 얼어버리게 할 수 있는 웃음도 얼어버리게 할 수 있는 겨울이라는 감정 당신이라는 기묘한 감정 눈이 내린다 당신의 눈 속으로 눈이 내리다 사라진다 당신 속으로 들어간 눈 그 눈을 사랑했다 한때 열렬히 사랑하다 부서져 흰 가루가 될 때까지 당신 속의 나를 사랑했다 그러나 오늘 다시 첫눈이 내리고 눈처럼 사라진 당신의 심장 내 속에서 다시 뛰기 시작한다 (그림 : 남택수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