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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호 - 길장미시(詩)/시(詩) 2022. 7. 16. 20:39
6월의 담벼락은 샤넬 No. 5 거리의 장미들은 몸 전체로 향을 피워내는 법을 안다 불가리아 벌판에서 자라 손가락 긴 파리지엥의 귓불에서 증폭될 흑장미들은 모른다 마을버스의 승객들과 인사하는 법 가슴 속에 피어 종점까지 길게 향을 간직하는 법 장미의 마을에서는 소음도 향이 된다 코로나로 닫혀있던 학교 문이 장미의 계절에 열리고 꽃보다 향이 깊은 아이들은 아름다운 소음을 뱉어낸다 이야기를 먹고 자란 장미들은 사춘기의 하굣길을 훌쩍 키 크게 한다 그래서 길에서 자란 장미들은 뜨거운 햇살에도 시들지 않는다 울타리를 넘어온 장미에 취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소녀가 스틸 컷이 되어버린 모퉁이 노선버스들은 장미 향을 담기 위해 빈 차로 왔다 (그림 : 장종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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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삼용 - 보성 녹차밭시(詩)/시(詩) 2022. 7. 16. 12:59
푸른 뱀이 똬리 풀어 굽이진 산허리 휘, 휘, 휘감았다 실그늘 돌아드는 철 이른 볕살아 살가운 채광 당사실같이 쏟거라 푸르름 머리에 이고 우뚝 선 편백아 너는 곧은 키로 하늘 향해 섰느냐? 내사 차분하게 구름 덮고 누워 만향을 베었다 득랑만 갯벌 소금기 절인 바람이 몽중산 봇재를 남실남실 거닐어 와 꿈엔들 반가울 고운 임 댓 자락에 나긋하게 누웠으니 행랑채 사랑방에 찻물 팔팔 끓거든 순백자 쌍 잔, 다반에 잎차 몇 잎 던져 넣고 말라붙은 기억을 우려 아득하게 취하리니 임 향기인 듯 차향인 듯 내 몰라도 좋아라 (그림 : 설종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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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산 - 놀라운 노동의 가치시(詩)/시(詩) 2022. 7. 15. 20:49
파업이 끝나자 처음 알았지 우리 노동의 놀라운 가치 삼십 년 동안 한 달 이백만 원 남짓 고스란히 모아도 어림없는 한 달 파업의 가치 놀라운 가치 수백 억 손해배상 청구서와 수십 명 해고통지서 처음 라인을 멈추고 기계를 멈추고 공장을 세우고 공장을 지키면서 시작한 싸움 한 달 동안의 파업 손때 묻은 기계를 세우고 몽키스패너 대신 노동조합 깃발을 들면서 우리가 요구했던 것은 최저생계비와 일자리 보장 재벌들이 경제를 망쳐도 노동자 탓 비리와 부정으로 세상이 썩어도 노동자 탓 평생 공장에서 일만 했던 노동자 탓 세상 허물 다 노동자 탓이라 몰아도 눈감았지만 삼십 년 노동이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리는 세상 쫓겨난 자 노여움에 공장 앞을 떠나지 못하고 남은 자 부끄러움에 쫓겨 돌아가는 오늘 우리는 몰랐네 평생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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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웅 - 슬픔은 혀가 없다시(詩)/박지웅 2022. 7. 15. 20:41
슬픔이 왜 말이 없나 보니 혀가 없다 그는 지금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가 살아온 방식에 대한 예민한 기록 혹은 지극히 외로운 해명 그는 누구인가 아니 그는 누구였을까 본디 그는 없는 듯이 살아왔다 기쁨과 배다른 형제로 태어나 멸시받으며 살았다 평소 온순한 뱀으로 조용히 기어 다니지만 내 마음이 떠나가, 따위 말에 한순간 아가리 벌려 꽃을 삼켜버리기도 했다 말했듯, 슬픔은 혀가 없다 실은 두 갈래로 갈라진 찢긴 마음뿐이다 손수건 같은 곳에 조용히 숨어 지낼 뿐이다 득달같이 달려와 환심을 사려는 가벼운 기쁨에 비할 수 있을까, 또 큰 기쁨은 구덩이를 깊이 파는 법 본디 그는 손만 잡아주어도 마음을 빼앗기는 정결하고 유순한 처자였다 기쁨이 손 내밀자 순진하게 따라나섰다가 몸을 빼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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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남희 - 감천 마을시(詩)/시(詩) 2022. 7. 15. 12:29
경사진 골목길에 내 달리는 마을버스 거미처럼 납작 엎드리면 통과될까 피난 시절 언 손 감싸고 부르튼 손 담벼락에 녹이던, 그런 한때가 숨어 있다 탄탄한 세로줄 계단에 매달린 듯 엉거주춤한 노파의 퇴행성 무릎관절은 아직 물 마르지 않았는지 내쉬는 축축한 한숨 소리에 건넌 집 창살이 출렁거렸다면 쉿, 옥녀봉 나무들 또한 오늘 거친 호흡법이다 골목이 삼킨 비릿한 피바람 진동해도 그 사이사이로 비대한 수레가 지나가자 골목의 헐은 위장이 잠시 빵빵 해진다 골목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발자국들 그 다닥다닥한 바퀴자국 꿀꺽 삼킨 위장술 뛰어난 좁은 골목 배고픈 거미는 매일 말간 얼굴인데 거미의 내장 속 승객이었던 나 빨고 있던 막대사탕 하나 툭 던지자 단내가 온기가 되는 홀쭉한 골목이 발그레하다 (그림 : 박용섭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