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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송포 - 그리움이 벽이다시(詩)/시(詩) 2022. 7. 27. 22:45
북촌마을 골목은 서로 닮아 있다 벽과 벽 사이 대문만 아니라면 다 한집인 줄 알겠다 오래된 그리움이 사는 까닭이다 딱 저만큼의 높이로 갈라서 있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그리움은 그러니까 벽을 갖는 일이다 보일락 말락 아슬한 경계로 눈빛 오가는 일이다 가난을 모르던 골목길에 땅속 깊 이 나는 거울을 묻어놓았다 우물 속에 별도 은하도 허리를 꺾고 부르던 노래도 다 묻어놓았다 구들장 안의 정지에서 밥 을 짓던 불빛이 새어 나온다 어머니가 골목에서 소녀를 부른다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 어야지 종갓집 맏며느리의 곡소리가 담장 주름 사이로 흘러나 온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진지 삼년상을 올린 가락이 휘어진다 담벼락을 돌아 귀퉁이로 가면 애인은 부엉이 흉내를 낸다 밤 마다 소리는 창을 넘고 천변을 타고 자전거 바퀴를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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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리 - 백년해로시(詩)/시(詩) 2022. 7. 27. 17:45
물비늘이 바다 한가운데에 모여 길을 이룬다 붙잡고 싶은 시간이 있었지만 부러진 여름의 손톱들로 거기 남아 있고 젖은 옷을 모래사장에 펼쳐 두고 물수제비를 뜨는 아이들, 돌은 자신이 닿은 자리마다 몸을 새기고 가라앉는다 그늘진 풀밭에서 이끼가 자라나고 어디선가 강아지풀을 꺾어 와 옆으로 누워 있는 나의 뺨을 간지럽히는 당신 등대에 불이 켜지고 물속으로 떨어지는 그림자가 사방으로 물방울을 흩뿌렸다가 잔잔한 물결이 되어 돌아간다면 저것은 누가 버린 기분일까 여유롭고 근사한 날에 이곳의 평화는 한순간에 깨질 것이고 나는 당신과 아이들을 데리고 여길 떠나려다 질퍽거리는 땅에 맨발이 파묻히겠지 우리는 발목이 잘린 사람처럼 어디로도 달아날 수 없이 다시 바다를 향해 얼굴을 돌리고 수평선은 불안 속에서 몰래 훔쳐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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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 휴가 단상시(詩)/이해인 2022. 7. 25. 23:11
늘 나를 지탱해 주던 내 마음이여 몸이여 그동안 삶의 길 달려오느라 매우 힘이 들고 지쳤던 그대를 오늘만이라도 편히 쉬게 하겠다 창문을 활짝 열어둔 채 바람 소리 새소리 파도 소리 별빛 쏟아지는 소리 귀 밝아야 들을 수 있는 나뭇잎 소리도 들려주겠다 맑아져라 깊어져라 넓어져라 후렴으로 노래하다 스르르 눈이 감기는 시간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단순한 고요함만으로도 휴식이 되는 시간 이 시간을 잘 키워 빛나는 보석을 만들겠다. 항상 기쁘게 살겠다. (그림 : 최민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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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식 - 나에게 술이란시(詩)/시(詩) 2022. 7. 25. 14:13
내게 술이란 아침 해와 같다 네가 아침 해처럼 두둥실 떠오른다는 것은 내 삶이 풍요로워 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는지 몰라도 내게는 네가 그렇게 쌈빡했다 네가 없는 삶을 난 생각조차하기 싫고 해본 적도 없다 네가 있음으로 해서 세상은 살만했고 즐거울 수 있었으며 아픔도 이겨내고 기쁨도 나눌 수 있었다 네가 있음으로 해서 고통도 이겨낼 수 있었고 외로움과 쓸쓸함도 극복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 나는 너를 사랑할 수밖에 나는 너의 역할을 믿는다 너로 인해 내 삶이 환하다 (그림 : 이새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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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환 - 소등과 점등 사이시(詩)/시(詩) 2022. 7. 25. 14:11
빛이 안으로 들어와 눈부시면 목숨의 곁가지야 아무렇지 않게 놓아주어야 할 일이다 언제부터 빛은 소멸이었는지 언제부터 씨앗이 죽은 것의 다른 이름이었는지 그런 사실을 알았을 땐 아무렇지 않게 생활이 우스꽝스럽고 가끔 팔자에도 없는 호사를 누릴 때도 별것 없는 술객의 처량이 밝게 빛나는 것이다 눈을 감고 길을 걸었다 소멸되는 점등의 시간을 뒤로 하고 또 걷다 보면 별이 무덤처럼 보이면서 동공 안으로 들어온 빛의 입자는 고장 난 신호등처럼 까마득하였다 간판이 꺼진 길 골목을 배회하는 한 사람의 뒷목이 빛의 배후로 남아 있다 (그림 : 김구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