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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옥 - 나를 만지다시(詩)/시(詩) 2022. 8. 17. 19:49
어둑발 내리고 또 혼자 남아 내 몸을 가만히 만져보네. 얼마만인가. 내가 내 몸을 만져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네. 그래, 기계처럼 살아왔으니 고장이 날 만도 하지. 기름칠 한번 없이 돌리기만 했으니 당연한 일 아닌가. 이제 와서 닦고 조이고 기름칠 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내 몸 곳곳의 나사들은 붉은 눈물을 줄줄 흘릴 뿐이네. 필사의 버티기는 이제 그만, 급기야 나사 하나를 바꿔볼까 궁리하네. 나사 하나쯤 중국산이나 베트남산이면 어때, 벼락 맞을 생각을 하기도 하네. 어둠 속에서 난 싸늘하게 굳은 나사 하나를 자꾸만 만져보네. (그림 : 이형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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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희 - 어느 집 낡은 담장 너머로시(詩)/시(詩) 2022. 8. 7. 21:30
초록에 밑줄 긋는 사이 길섶 망초꽃 부용당을 수놓고 있다 그녀의 옛 숭문동에 이르러 풀물 배인 바람을 듣는 신발 두 짝 꽃신 자국인 듯 토끼풀 간간이 펼쳐있다 문향한 여백 너머 마주 오는 먼 눈빛 하나 이곳쯤이었을까 조카들 더불어 천진하게 시문에 젖던 곳 남쪽 강 물결지듯 산딸나무 흰 모시 쓰고 마실 가는데 어느 먼 여로에 뒤설레던 그녀 죽어서도 살아있는 삶 하나 꺼내 든다 봉인된 시간을 곰곰이 걷는 유월. 어느 집 낡은 담장 너머로 얼굴 내민 접시꽃 묻고 싶은 말 몇쯤 마음에 둔 채 오동나무 그늘 밀며 돌아오는 해거름 그녀 수틀 안 꽃들 길을 내고 있다 (그림 : 박연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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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희 - 바람의 이분법시(詩)/시(詩) 2022. 8. 7. 21:28
햇살 맑은 날이면 투명한 ㅂ은 공중에 유리알 같은 깃발을 내걸었다 오래전 골목 끝으로 낡은 단어장을 던진 소년을, 바람은 알고 있었다 마을회관 안쪽 누군가의 등 굽은 무용담도 이젠 낙엽만큼 효험이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너라는 모서리에 묶여 백기처럼 펄럭이던 꽃무늬 손수건, 알고 보면 그 모두는 ㅂ이 너의 오후에게 저지른 수줍고 향긋한 만행이었다 투명한 것들이 새떼처럼 불어왔다 떠나간 날이면 저녁상 물린 창밖 나뭇가지 어디쯤에 이미 그가 와 있었다 ㅂ은 오래 말을 아꼈고, 이따금 그녀 목 안쪽에서 습기 밴 바람 소리가 걸어 나오곤 했다 아침이면 남쪽 창을 열고서 추락하지 않기 위해 먼 길로 떠나던 무수한 바람들이 사나흘씩 ㅂ의 품에 갇혀 향긋한 고백들을 들려줘야 했다 신성리갈대밭에 가보면 태양의 세 번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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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숙 - 그 여자네 국숫집시(詩)/시(詩) 2022. 8. 7. 21:25
간판은 없다 가게 문 앞에 내놓은 이 빠진 국수 사발에 봄부터 가을까지 키 작은 꽃이 피어나고 겨울에는 눈밥이 고봉으로 쌓이는 집 비법의 육수도 없다 날씨 따라 계절 따라 간이 흔들리기도 하겠다 그날 마는 첫 국수는 죄 없이 배고픈 이들의 몫으로 달항아리에 뗀다 마음이 마른 면같이 부서지는 날은 써 붙이고 저녁 장사 접는 날도 있다 면발보다 사람 고파 드는 손님 묻지 않아도 긴 안부 뽑아내면 경사에도 조사에도 다 배불리 먹으라 국수사리 수북이 부조하는 주인 국숫물 다스리듯 마음 재우고 면이 익어가듯 늙어가면 되겠다 (그림 : 허영아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