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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초대장 없이 같은 숲에 모여들었다.
봄에는 나무들을 이리저리 옮겨 심어 시절의 문란을 풍미했고
여름에는 말과 과실을 바꿔 침묵이 동그랗게 잘 여물도록 했다.
가을에는 최선을 다해 혼기(婚期)로부터 달아났으며
겨울에는 인간의 발자국 아닌 것들이 난수표처럼 찍힌 눈밭을 헤맸다.
밤마다 각자의 사타구니에서 갓 구운 달빛을 꺼내 자랑하던 우리.
다시는 볼 수 없을 처녀 총각으로 헤어진 우리.
세월은 흐르고, 엽서 속 글자 수는 줄어들고, 불운과 행운의 차이는 사라져갔다.
이제 우리는 지친 노새처럼 노변에 앉아 쉬고 있다.
청춘을 제외한 나머지 생에 대해 우리는 너무 불충실하였다.
우리는 지금 여기가 아닌 곳에서만 안심한다.
이 세상에 없는 숲의 나날들을 그리워하며.
(그림 : 이기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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