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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자 - 어제는 흐렸고시(詩)/시(詩) 2022. 9. 28. 08:54
눈은 떴으나 보이지 않았다 그물망에 얽히고설킨 인간관계는 더러 바다 밑에서 무거웠고 무섭게 시렸다 부풀려진 오해가 파도를 일으키고 바위에 부딪혀서 물거품으로 흘러내려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렸다 허상이 눈을 가리고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라고 속삭였다 산사태가 난 것도 아닌데 막혀버린 경계가 하필 절벽과 허공이 맞닿은 어름이라니 무릎은 꺾였고 망가진 아킬레스건을 부여잡고 버둥거린다 통증이 잦아들기를 바라며 가보지도 못한 길에서 돌아올 일을 먼저 생각하다니 지내보아야 아는 것들을 만날 수조차 없는 지금 가난이 흐르는 마음 한 가닥을 지푸라기 삼아 외줄 하나 걸었다 곧장 사람에게로 이어진 길이 보인다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비가 개였다 땅이 젖어서 더 선명해진 흙내음 냄새가 난다 구체적이다 (그림 박운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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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자 - 재개발에 내어주다시(詩)/시(詩) 2022. 9. 28. 08:51
묵은 살림 널브러진 집 돌절구 뒹구는 마당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어머니가 윤기 잃은 마루에 구부정히 앉아 나뭇결을 쓰다듬는다 금이 간 유리 거울 모서리에 초저녁 햇살이 쨍하다 반짝임 잠깐 부서진다 담쟁이넝쿨이 먼저 울타리를 차지하고 제집이라고 서슬 퍼런 주장을 늘어놓는다 팔 남매 왁자했던 사람 소리 떠나간 자리에 감나무 모과나무가 올해도 벌레에게 몸을 내주었고 움푹 팬 옹두리에는 모기가 알을 낳아 키우는 모양 비스듬히 허리를 잡고 섰는 대문은 출입금지 띠를 두르고 굴착기 맞을 준비를 한다 이제는 그만 가시자고 슬그머니 어깨를 돌려 대문을 나서려는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두드려 만든 문빗장을 잡는다 여기가 내 집이여 남의 집이여 들릴 듯 말 듯 혼잣말에 좁아드는 숨구멍이 답답해 자주 가슴을 두드린다 어머니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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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솜 - 어떤 무렵시(詩)/시(詩) 2022. 9. 28. 08:49
바람의 살결이 만져지는 배동바지 때 태양의 수다가 잦아진다 따듯한 구름이불 몇 채 공중에 펼쳐지면 나 꽃이오 말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바람이 수줍은 벼꽃 속을 들춘다 조용히 격렬하게 누가 볼세라 서둘러 일을 치르는 낮거리 물방개가 봤을까 개구리도 봤겠지 꽃밥을 위해 장대 같은 미루나무 서넛 보초처럼 길가에 세워두었지 낯 뜨거운 그늘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이 가던 길 멈추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누구도 모르는 일 이제부터 다닥다닥 벼 머리는 골똘해지겠지 부푸는 공중 아버지의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가고 그때쯤 엉덩이 펑퍼짐한 노란 주전자 논둑길 타고 흔들흔들 가까워져 온다 배동바지 : 벼의 이삭이 나오려고 대가 불룩해질 무렵. (그림 : 김완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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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현 - 앵두시(詩)/시(詩) 2022. 9. 24. 18:40
요 며칠 앵두 따러 다녔어요 아파트 산책로 한 그루 앵두나무가 나를 잡아끌데요 앵두가 익을 무렵인 줄 몰랐는데 가지 찢어지게 영글어 바알갛게 쫑알거리데요 누구도 눈길 주지 않는다고 뾰로통 입술을 내미네요 사람들은 저마다 바쁘다는 핑계로 눈길 하나 건네지 않았겠지요 별 볼 일없는 나 같은 사람이나 앵두에 눈 맞추며 가슴 콩닥거리겠지요 손가락을 디밀어 빗질하듯 가지 밑 다닥다닥 붙은 앵두알을 훑었지요 탱글한 앵두알에 금방 손바닥이 흥건해지는군요 앵무(鸚鵡)들 허천나게 탐낸다는 그것을 혓바닥에 올려 오밀조밀 궁굴려봅니다 늦봄 한나절 잠시라도 한 마지기 그늘에다 한 모숨 초록바람까지 더해 늦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얕은 잠속을 자박자박 서성이다 멀어진 당신의 발자국 소리도 다가오는 듯합니다 저 바알간 앵두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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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용순 - 별들이 지는 계절시(詩)/시(詩) 2022. 9. 24. 18:37
붉게 빛나던 별들이 재가 되어 지상에 내릴 때 바스락거리는 소리들 속에 사라져가는 세계들 바스락거리는 소리들 속에는 소리도 나지 않던 연두의 세계와 숱한 바람들과 정을 통하던 푸른 세계와 타오를 수밖에 없던 세계들 그 시뻘건 이야기들이 아주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귀를 기울이며 내 안에서도 별이 지는 소리 이야기들이 사라지는 소리 네가 머물던 자리들마디 별들의 우는 소리 그러니까 별들은 바스락거리며 운다 별들이 지는 계절 나를 따라온 너라는 볕에 스치우며 내게 남아있는 지상의 시간을 그려본다 (그림 : 한임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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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금 - 국수나 먹자시(詩)/시(詩) 2022. 9. 22. 17:27
밤거리에서 우연히 만나거들랑 국수나 먹자 허름한 불빛 어두운 국숫집에서 뜨거운 국물 후후 들이켜며 국수나 먹자 고춧가루와 파의 매운맛에 눈물 콧물이 나거들랑 너도 참 외로웠구나 실은 나도 오늘 무척 외로웠단다 말없이 웃어주며 국수나 먹자 이 세상은 잔잔한 것 같아도 세찬 파도들이 몰려와 느닷없이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 또 흔들릴 때도 있어 간혹 밤거리를 배회하다 우연히 만나거들랑 참 장하구나 어깨 두드려주며 따뜻하고 진한 국물에 불 같은 마음 전하고 탱탱하고 쫄깃한 면발에 돌 같은 단단한 마음 전하며 국수나 먹자 국수나 먹자 (그림 : 허영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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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홍진 - 비로소, 들리다시(詩)/시(詩) 2022. 9. 22. 17:22
말을 내려놓기 위해 산을 오른다 허리를 굽히고 혀를 꺼내 오른손에 쥐고 오를 때 비로소 들린다, 말 계곡물은 작은 돌에서 큰 돌 큰 돌에서 나무 나무에서 구름 위로 음계를 그리고 새들은 그 음계의 중간쯤에 있다 바위산은 가장 무겁고 두꺼운 시간의 책장 참나무 단풍나무 서로 다른 페이지로 흔들린다 단풍잎은 바람의 입술에 입술을 맞대고 뜨겁다고 느끼고 간지럽다고 말한다 발자국 소리에도 까르르 웃는 풀꽃의 이름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까르르 풀꽃 말로는 형용할 수 없어 말을 내려놓는다 내려놓아야 비로소 들리는 저, 말 듣기 위해 내려놓는다, 말 (그림 : 남일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