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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규 - 목화밭 이야기시(詩)/시(詩) 2022. 10. 4. 08:30
탄성으로 피어나는 꽃이 있다 피어날 때 하양 지기 직전 분홍을 완성헌더는 목화에 대해 알고 있니 아침에 희고 저녁을 지나 붉어지는 이치 혀끝 속삭임에 물들어가는 마음과 같이 가까운 하양과 먼 분홍 사이 완성되지 못한 문장들이 피었다 지다 피었다 지다 목화의 꽃말은 여럿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뜻의 우수 그런데 우리는 왜 근심 쪽으로 몸이 기울었을까, 함부로 혹은 입춘과 경칩 사이 절기를 떠올렸을까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에 대해 알고 있니 목화꽃이 지고 나면 둥글게 차오른다는 다래 다래의 맛이 달아 하도 몸이 달아 몰래 숨겨놓고 먹었다는 소년의 비밀비밀 그런가 하면 다래가 터뜨린 솜꽃을 편애하는 자가 어느 시험에서 두 번 꽃 피우는 나무에 대해 물었다고 해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속삭임, 귀가 멀어도 좋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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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가경 - 사문진 나루터에서시(詩)/시(詩) 2022. 9. 30. 15:06
꽃 필 때를 알고 찾아온 사람들 머리카락은 대게 희끗하다 이 나무에서는 어떤 향이 나고 저 나무에서는 어떤 향이 나는지 생목의 목피를 벗겨보지 않아도 핀 꽃의 입모양을 보면 안다 말문 터진 속도가 다른 것처럼 술잔 속에서 출렁이는 낙동강 물에 주막의 막걸리는 주모의 시름 맛이다 겨울의 이별 때문에 움츠리다 온 사람들은 벌컥벌컥 꽃의 향기를 삼키고 높은 나뭇가지 올라가 먼저 핀 꽃이 되는 사문진 나루터 그 옛날 돛배를 펄럭이게 하던 바람이 돌아와 꽃을 흔든다 성급하듯 먼저 터트린 웃음에 희번득 따라 웃는 강물소리 (그림 : 김영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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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자 - 골목길 1시(詩)/시(詩) 2022. 9. 30. 15:04
정릉 골목길을 걷는다 사라지기 전에 그리운 연인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마주하는 마음으로 걷는다. 나이 먹어 정감이 풀풀 나는 골목을 백열등 전등빛이 금빛으로 물들이는 밤 구수한 된장냄새 왁자지껄한 목소리마저 고요히 수채화 물감처럼 풀어진 길 술 몇 잔 걸친 걸걸한 목소리 곤히 잠든 밤 깃든 영혼을 그윽한 눈빛으로 품고 있다 구들을 데우느라 하얗게 타버린 연탄재가 푸른 대문 앞에서 여린 달빛에 시간을 달구는 골목길을 아픈 발목을 끌며 천천히 정겨운 품안을 거닌다 조각달이 뿌옇게 어깨를 토닥인다 (그림 : 이갑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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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 가을 나무시(詩)/이병률 2022. 9. 30. 14:57
뭔가를 정하고 싶을 때나 뭔가를 정할 수 없을 때 나뭇잎의 방향을 보라 나무가 잎을 매달고 잎을 떨어뜨려 흩뿌리는 계절엔 다 이유가 있으니 뭔가를 알고 싶을 때도 알아야 하는 것이 진실이 아닐 때에도 새가 열매를 물고 날아가는 그쪽 방향을 보라 나뭇가지에 열매를 매다는 것에도 할말이 있으니 가을 한철의 그리움들은 힘을 놓고 끊어진 힘들은 다시 어느 한곳에 모여 나무로 자랄 것이니 부디 하고 싶은 것이 있거나 하고 싶은 것들을 조용히 거둘 때도 나무뿌리 가까이에 심장을 대보라 흙으로 덮이면 덮일수록 뿌리는 내리고 내려 가닿는 데가 닿을 데라는 것을 알게 될 테니 그러니 기차가 떠나버렸거나 기다리는 사람이 오지 않을 때에는 겨울 할아버지 앞으로 몰려가 수북이 질문을 하는 나뭇잎의 흩어지는 방향을 보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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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 - 빈집시(詩)/시(詩) 2022. 9. 28. 09:03
절실했던 방 하나 따로 가져 보지 못하고 떠나온 고향 고향 지키며 저 혼자 늙어 가는 빈집은 알아야 할 역사와 몰라도 될 비밀을 꿰찬 독거노인이다 옹색할수록 자식 농사 오진 영자네 식솔들 다독여 키워준 둥근 밥상에 둘러앉아 양푼의 정을 나누던 삼남육녀 과거로의 타임머신은 연보라 꽃대궁 한들거리는 마비의 무도장 무장다리 밭에 머물다가 타향에 둥지 튼 혈연들을 그려본다 상주읍 남성동 57번지, 이자 덕자 영자 아버지 문패 걸린 있으나 마나한 대문이, 이름값은 하겠다는 야무진 각오의 대문이 구남매를 반듯하게 지켜주었지 서울 충주 인천 더러는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빈집이었다가 흔적조차 없어진 언저리를 기웃거리는 낮은 그림자 하나 가진 것 보다 없는 것이 풍성함을 되돌아본다 두드리지 않아도 딩딩 울리는 여기 공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