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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 운주사 와불 앞에서시(詩)/성선경 2022. 10. 28. 09:39
저렇게 꽃피는 일이 천 년이라면 나는 아직 젊다 나란히 누워 하늘만 바라보며 또 천 년이라니 이제 마당 어귀에 꽃밭도 일구고 채송화나 봉선화를 심어도 좋겠다 어디 백반이나 구해와 손톱에 꽃물들이며 한 백 년 호호거려도 좋겠다 너 닮고 나 닮은 아이들을 낳아 장난기 가득한 돌탑이들 일흔 개나 여든 개 세워놓고서 나란히 팔베개를 하고 별자리나 찾으며 한 계절을 넘기면 또 어때 한 번 꽃피는 일이 이렇게 천 년이라면 나는 아직 젊다. (그림 : 심수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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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일 - 빨래집게시(詩)/시(詩) 2022. 10. 24. 12:30
연립주택 옥상 빨랫줄의 빨래집게 아기의 속옷가지를 말릴 때는 새끼 원숭이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장난을 치듯 한 손으로 빨랫줄에 매달리는 여유를 부렸고 청바지같이 무겁고 잘 마르지 않는 빨래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어떤 때는 203호 아가씨의 손바닥만 한 팬티를 물고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했고 505호 막일하는 김 씨의 낡은 운동화의 발냄새도 잘 참아냈다 무겁고 커다란 이불을 널어야 할 때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일은 홀로 감당해야 했다 비 오는 날은 내일의 끼니를 걱정해야만 했고 바람 부는 날은 일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바둥대기도 했다 어쩌다 한가한 날에는 창공을 우러러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잊고 지냈던 지난 꿈들을 한두 마씩 끊어 너울너울 날려보냈다 어느 때부턴가 물고 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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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석 - 조금은 외로운 사랑시(詩)/시(詩) 2022. 10. 24. 12:28
때로 사랑이 두려워지면 우리 저 남쪽 신안의 앞바다로 가자 거기서 너는 꼭 반달만 한 섬이 되고 나는 꼭 조롱박만 한 섬이 되자 너무 멀리는 말고 문 열면 지척인 그저 반 마장쯤의 거리에서 너는 반달섬이 되고 나는 박섬이 되자 조금은 우리 사랑 식혀 보자 너는 밤마다 반달로 오르고 나는 조롱박에 천년 샘물을 담아 온밤이 아닌 딱 반밤만 달 물살 반짝여 보자 나머지 반밤은 하늘에 뿌려 은하로 흐르게 하자 그래도 못내 사무치면 너와 나 사이에 길을 놓자 진종일 오가는 바윗길이 아니라 물 들면 잠기고 물 나면 드러나는 그런 노둣길을 놓자 그 노둣길 걸어 한나절이 아닌 딱 반나절만 해조음에 귀 기울이자 나머지 반나절은 물속에 두어 짭조름히, 짭조름히 절여지게 두자 한생이 쉬이 저물어서야 쓰겠는가 그래서 먼 훗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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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정 - 이력서시(詩)/시(詩) 2022. 10. 22. 17:46
나를 사가세요 성실함으로 열심히 살았어요 거짓말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남의 것 욕심내지 않았으며 무단횡단 한 번 하지 않았어요 계단을 오를 때는 왼쪽으로 올랐으며 어느 날부터인가 오른쪽으로 가라 해서 발걸음이 먼저 찾아가는 왼쪽방향을 신경 써서 고쳐 오르기도 했어요 경로 우대석은 늘 비워두어야 했기에 현기증에 몸 가누기 힘들어도 늘어진 손잡이 꼭 부여잡고 서 있었고 연말에 이웃돕기 성금도 꼬박꼬박 냈어요 아이 둘 낳아 건강히 키우며 명절 때 제사 때마다 직장 다니느라 바쁜 사람들 위해 장보고 음식 장만하며 기쁘게 살았답니다 더 이상 기대지 말고 자신을 찾으라 해서 이력서 꺼내놓고 한 줄 적었습니다 1984년 **상업고등학교 졸업 기억도 가물가물한 결혼 전 직장을 적어야 하나?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학생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