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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 대개시(詩)/시(詩) 2022. 12. 13. 15:45
잘 될 겁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그걸 모르겠습니다. 잘 살 거예요. 누가요. 우리는 잘 살 거예요. 어떻게요. 그건 모르겠지만요. 나는 당신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당신과 친했던 적이 있었어요. 당신에 대해 아주 잘 알았습니다. 열 손가락에 각인된 지문을 살펴보며 낄낄댔던 장면이 기억나요. 실은 그것만 기억이 납니다. 당신을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을 못 믿겠어요. 멍청이들이나 기억을 믿을 겁니다. 실은 멍청이가 되고 싶었습니다. 당신과 친했던 적이 있었는데 당신을 모르겠다고 말하는 멍청이가 되기 전까지는 기꺼이 멍청이가 되고 싶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나눈 대화가 전부 폭력이었다고 두려워하는 사람 앞에서 그것이 무엇이었든 우리가 누구였든 대화한 적 없는 사람과 대화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경험한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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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온 - 월요일시(詩) 2022. 12. 9. 18:52
생각나는 건 별로 없었다 멈출 수 있었지만 멈추면 더 이상 영화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고 아무도 멈추지 않아서 내가 영화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어둔 극장에서는 모든 게 멈춰있는 것 같아서 머리를 옆으로 기울이고 어깨를 낮췄다 누군가의 얼굴과 나의 얼굴이 겹쳐있었다 심드렁해서 발을 꼬고 무릎을 맞댄 것처럼 영화는 흘러갔는데 월요일이었다 뚫어지게 쳐다봐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 몸이 무거워도 영화가 영화를 끝낼 거라는 걸 알았다 나는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조금 더 어깨를 낮춰도 상관없었다 그래도 볼 건 다 봤으니까 영화가 영화를 이끌고 가는 중이었다 (그림 : 원은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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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서 - 바닥의 습관시(詩)/시(詩) 2022. 12. 9. 16:05
바닥만 보고 걷는 것은 내 오랜 습관이다. 발끝으로 허공을 톡톡 차고 걷다 보면 뒤꿈치까지 따라서 구름을 툭툭 찬다. 그러니까 발이 나를 가운데 두고 자기들끼리 밀고 당기는 동안 나는 앞으로 간다. 뒷발이 발끝으로 미는 동안 발꿈치는 내리막이다. 내 몸에는 그렇게 내리막과 오르막이 사이좋게 살고 있다. 내 몸속에 기거하는 이 오르막과 내리막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오래된 내 구두코가 뭉개지고 바람 소리 들려왔다. 구두 끝은 발톱처럼 둥글 뭉툭하다. 무엇 하나 아프게 발로 차 본 적 없다. 어쩌면 구두 끝이 뭉툭한 게 그래서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내 몸은 여전히 오르막과 내리막이다. 오르막길에서도 난 여전히 바닥만 보고 걷는다. 마치 물속을 걷는 것처럼 내 안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서로를 부드럽게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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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진 - 꽃게시(詩)/시(詩) 2022. 12. 9. 16:00
출렁거리는 파도에 맞서 험난한 인생 살다 보니 가장 요긴한 물건은 집게였다 적과 싸우거나 먹잇감을 사냥하거나 포식자가 나를 공격할 때 오직 집게만이 언제나 내 편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동고동락을 같이했다 집게 하나만 있으면 무섭고 두려울 것 아무것도 없었다 산만한 해일이 덮치고 거친 파고가 온 세상을 휩쓸어도 폭풍 속 소용돌이 한가운데 고요하고 평온한 안식을 취할 수 있었다 상대를 한번 꽉 물면 절대로 놓지 않는 그 근성으로 움켜쥔 것들이 참 많았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모두 집게 때문에 얻게 된 결과였다 주위를 가만히 둘러보면 양손에 집게를 번쩍 든 사람들이 도심 곳곳에서 삐딱한 걸음으로 우르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놓아야 할 때 놓지 못하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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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형 - 사진시(詩)/시(詩) 2022. 12. 9. 15:57
꽃들이 사는 계절이면 좋겠다 내 생애 봄날 같은 사진이면 좋겠다 잠깐의 들뜸과 잠깐의 평온이, 아니지 슬며시 왔다 슬 며시 가는 곁 같은 게 보였으면 좋겠다 작은 격렬이 얼비치다가도 세월의 자국이 긁히지 않았 으면 좋겠다 그곳에 마실 가듯 소홀했던 시간을 천천히 업고 가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벗의 장례식에 다녀와 손에 쥔 비통을 풀고 저녁을 끌 어 덮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실컷 꿈꾸다 꿈이 꿈같지 않아 탁탁 털며 깬 얼굴이었 으면 좋겠다 꽃들이 사느라 바쁜 사월이면 좋겠다 내가 아는 이들이 바쁘게 사느라 나를 찾지 않는 사월 이면 좋겠다 사진사 양반 잠깐만 숨 한 번 몰아쉬고 찍읍시다 한눈에 봐도 나인 줄 알아 한 사나흘 머뭇머뭇 머물다 가는 사진이면 좋겠다 그러니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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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밝은 - 애월(涯月)을 그리다 16시(詩)/시(詩) 2022. 12. 9. 15:50
차마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들은 아파서 바다는 땅을 부르고 땅은 바다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걸까 가로로 세워 보고 세로로 맞춰도 보고 그것도 맘에 안 들면 날카로운 트집으로 욕심껏 상처를 만들면서 서로의 취향에 길들이려고 아우성이었는데 미사여구 하나 없이 심심한 말들만 모아놓은 사전을 읽어주는 것 같아도 세상 어떤 노래보다 어깨 들썩이게 한 사람 마음만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고 간절해진 시간이 글썽이는 걸까 외침조차 기어이 목으로 삼켜버리고 봉숭아 꽃물 든 손톱 위에나 올려놓고 바라보는 얼굴 손을 뻗어도 끝내 닿지 않는 목숨이 있어 애월, 울고 싶은데 눈물이 흐르지 않는 건 그 변두리에 내 눈물 모두 묻어놓고 와버려서인가 봐 (그림 : 양준모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