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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옥 - 빈집시(詩)/시(詩) 2023. 4. 14. 01:29
다 떠나고 없는 친정집을 찾았다 마당에 들어서자 할아버지 헛기침 소리 담뱃대 두드리는 소리가 사랑방에서 새어 나온다 주인 없이도 무성하게 자라 빈집을 지키던 풀들이 다가와 발목에 착착 감긴다 소리 없는 닭들이 두엄을 파고 뽀얗게 먼지 쌓인 툇마루에서 엄마는 안반에 국수를 민다 온기 없는 아궁이에선 국수 꼬랑지 부푸는 냄새가 난다 부스럼을 한입 물고 삐걱거리는 마당 가, 녹슨 펌프에서 어린 손자의 끼~잉 소리가 똑똑 떨어진다 금 간 장독대 사이에 붉은 봉숭아꽃이 입술을 겹겹이 열고 활짝 웃는다 큰언니 나이를 따라 같이 자라온 미루나무에선 여전히 부엉이 소리가 앉았다 간다 저녁놀 붉게 물든 마당에 아버지 손때 묻은 사립문이 삐거덕거리고 바람에 서서히 닫힌다 모두가 없어도 움직임 가득한 집 (그림 : 이금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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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나 - 저 달이시(詩)/시(詩) 2023. 4. 14. 01:25
여기는 지리산 골짜기 산나물은 많고 여관은 없다 전화는 되는 곳보다 안 되는 곳이 더 많지만 사랑하기는 좋은 곳 갈 데까지 간 올 데까지 온 남녀가 숨어들어 한 석 달 열흘 불꽃 피워도 좋을 곳 오토바이 경적보다 산새 소리 더 크고 도시의 야경보다 별빛이 더 휘황한 곳 어깨 넓은 바위와 무심히 눈 마주친다 저 바위 같은 사람 하나 알고 있다 슬픔의 무게로 굳어진 바람의 손을 빌린 저 참나무는 마음을 깎고 가는 여자의 뒷모습 어디까지 들춰 보았을까 산새 한 마리 취한 듯 빗금으로 날아가고 이제 외로운 것들은 모두 별 뜨는 곳 어디쯤에 제 그리운 이름 하나씩 걸어놓으리라 언제부터 서 있었나 저기 산마루의 달 저 달에 너와집 한 채 지어놓고 한 열흘 안겨있어 볼까 차마 떠나지 못한 이름 하나 불러 손 비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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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환 - 떡갈나무 아래에 서면시(詩)/시(詩) 2023. 4. 14. 01:22
저렇게 앞산이 출렁이는 새벽이면 깔풀나무 한 그루쯤 붙들어 앉히게 마련이다 숲 터럭을 나뒹구는 뜻 모를 바람 소리 수천 가닥쯤 함께 다독이며 볼 따름이다 흔들리는 숲길과 마주친 새벽이면 바삭대는 낙엽 한 웅큼 집어 들고 반 걸음쯤 뒤따라온 마음 한 자락 조심스레 닦아내게 마련이다 여기저기 떠도는 당신의 분신 자꾸 발아래 밟히는 나직한 숨소리 돌아오지 못할 길을 돌아올 듯 가버린 사람 아직 거기 서서 쭈뼛대고만 있을 것인가 이 볼 시린 숲길에 다시 오면 숲 안개 흔들리는 떡갈나무 앞에 서면 묵언처럼 가두어 두었던 그리운 얼굴 주섬주섬 꺼내 보게 마련이다. (그림 : 박영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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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 - 잎시(詩)/장석남 2023. 4. 14. 01:17
어여쁘고 어여쁘도다 숨도 몇 번은 크게 내쉬어 눌러서야 가지런해지던 지난 봄 이야기야 하여서 무엇 하리 무엇 해! 너와 손잡던 그 햇빛을 그래도 한 번은 더! 새로 보는 추억처럼 어여쁘고 어여뻤어라 새 잎 날 때 저 떡갈나무, 느티들 어여쁨이 초록이 되어 시간의 시퍼런 여울일 때 그 그늘의 청담(淸談)을 잊을 수는 없어라 그렇지, 그렇지 하던 입술과 치열(齒列)들 하긴 연두를 이긴 말들이라니! 헌데 지금 마당가에 앉아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 하며 쓸리는 나뭇잎들 내 두 귀마저 떨어뜨려서는 마당에 주고 나서 한참 만에야 트이는 명오(明悟) "그렇지, 그렇지 않지." (그림 : 남진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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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 봄 나이테시(詩)/황동규 2023. 4. 14. 01:08
C자로 잘룩해진 해안선 허리 잎이며 꽃이며 물결로 설렌다. 노랑나비 한 쌍 팔랑이며 유채밭을 건너고 밝은 잿빛 새 두 마리 앞 덤불에서 뜬금없이 자리 뜬다. 바닷물은 들락날락하며 땅의 맛을 보고 있다. 그냥 흙 맛일까? 바로 뒤통수에서 물결들이 배꼽춤 추고 있는데. ' 섬들이 막 헛소리를 하는군. 어, 엇박자도 어울리네 물결들이 발가벗었어. 바투 만지네, 동그란 섬들의 엉덩이를.' 가까이서 누군가 놀란 듯 속삭이고 바다가 허파 가득 부풀렸다 긴 숨을 내뿜는다. 짐승처럼 사방에서 다가오는 푸른 언덕들 나비들 새들 바람자락이들이 여기 날고 저기 뛰어내린다. 누군가 중얼댄다. '나이테들이 터지네.' 그래, 그냥은 못 살겠다고 몸속에서 몸들이 터지고 있다. (그림 : 이현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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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록 - 극장의 추억시(詩)/시(詩) 2023. 4. 8. 07:30
기억의 성채도 언젠간 무너지지만 내 인생극장은 막을 내릴 수 없다네 삼팔장은 파장 흐느끼는 뽕짝 무대래야 장터 마당 우리는 들뜨지 학교에선 기죽던 강둑 아래 녀석도 나방처럼 설치지 노란 등 꺼지고 영사기 소리 밤하늘 긁으면 어김없이 죽죽 장대비 내리지 매가리 없는 삶 눈물처럼 때도 없이 내리지 사랑해선 안 될 사람 통통배는 서울로 가는데 소나무에 기대 바라만 보는 여인 아, 문 희, 눈물도 예쁜 저런 여자라면 삶이 한두 번 속여야지 그래도 지금 여자 갸름한 목덜미는 꼭 닮았다네 촌구석에 극장이라니 거무죽죽 지붕 사이 우뚝한 국제극장 김일 박치기를 단체로 볼 줄이야 허장강도 도금봉도 막걸리 안주 희갑이는 애들도 만만하게 보는데 장돌뱅이로 돌고 돈 필름은 장꾼들 셈처럼 자꾸만 끊어져 하필 두 입술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