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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정 - 여분시(詩)/시(詩) 2023. 5. 12. 17:14
여기 남은 것이 있다면 저녁 분꽃이 피는 장면을 바라보는 일 수박에 박힌 까만 씨만큼 꿈을 꾸는 일 씨앗을 담을 하얀 종이봉투와 묻어 둘 것들을 위해 모종삽을 사러 가는 일 여름을 이루는 말들과 잘 짜 놓은 겨울의 담요 첫눈이 손바닥에서 녹지 않고 내려와 눈사람을 만드는 일 생활의 간결한 숟가락이 놓인 식탁 온 산을 들어 올린 나무들과 선반 위의 화분들 그루터기에서 여전히 날아가는 새들 품은 알들이 모두 새가 되는 건 아니지 사랑의 격자무늬가 손가락에서 만져지겠지 그래도 남은 것이 있다면 볕 좋은 날, 대나무 채반에 잘 말린 미래의 약속처럼 (그림 : 이영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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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천 - 찔레꽃시(詩)/박상천 2023. 5. 8. 19:05
아파트 창문으로 넝쿨을 뻗어 올라온 하얀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당신이 심어놓은 것이지요. 하얀 찔레꽃이 좋다며 어렵게 어렵게 구해서 심어놓은 그 꽃이 피었네요. 작년에도 피었을 테고 재작년에도 피었을 텐데 그런데 꽃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다른 꽃들도 눈에 보이지 않았어요. 당신이 떠난 후 꽃이 피어도 내겐 보이지 않았나 봅니다. 그런데 올해 갑자기 꽃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당신 떠난 지 3년, 벌써 이렇게 안정이 되어가는 건가요? 그래서 갑자기 꽃이 보이기 시작한 올봄엔오히려 당신에게 미안한 생각이 드네요. 내 마음에 정좌한 당신을 보듯 흰 꽃잎 속 한가운데 들어앉은 노란 꽃술을 잠시 들여다봅니다. (그림 : 한희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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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희 - 봄을 늙게 하는 법시(詩)/시(詩) 2023. 5. 2. 19:39
봄은 잘 늙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잘 모른다 햇빛은 넌지시 가을에게 봄이 늙지 않는 이유를 알려준다 잘 들키지 않기 때문이란다 여름, 가을, 겨울의 몸에 숨어서 봄은 여전히 푸르다 가을 단풍이나 겨울의 눈발이 말하려는 것도 가을이나 겨울이 아니라 봄이다 가을이나 겨울의 발자국 속에는 어딘가로 향한 뒷걸음의 흔적이 있다 뒷걸음 쪽에는 늘 봄이 있다 그러므로 봄을 늙게 하기 위해서는 가을과 겨울을 먼저 늙게 해야 한다 가을과 겨울의 끝에 봄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게 해야 한다 제비는 강남에만 있는 것이라고 철모르는 뒷걸음에게 넌지시 일러주어야 한다 그런 다음 일찌감치 항복해야 한다 제 나이를 전혀 생각하고 있지도 않은 봄에게, (그림 : 안기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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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심 - 별빛 실은 그 잔바람은 어떻게 오실까시(詩)/시(詩) 2023. 4. 24. 19:54
가막만은 별빛 자르르한 옥토였다 먼 바다 돌아 온 달이 외진 포구 넘너리에 고삐 매어두는 밤, 개밥바라기별 앞세워 대경도 소경도 물결 찰방이는 소리에 우수수 우수수수 쏟아지던 별의 금싸라기, 뭍 에서나 물에서나 별의 숨결 받아먹고 숨탄것들 탱글탱글 여물던 찰진 별 밭이었다 큰바람도 여기 와선 숨을 고르고 별들과 뒹굴었다 언제부턴가, 경도 큰 고래 작은 고래 등허리에 줄지어 내걸린 큰 전등이며 나뭇가지 친친 감은 색색의 꼬마전구에 밀려 그 많던 별들은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잔잔한 바다에 고랑 이랑을 내고 별빛을 경작하던 바람도 이제 길을 잃었다 전설이 죽고 꿈도 사라졌다 밤낮없이 먹고 마시고 노느라 팽개쳐버린 별빛은 이제 더 이상 바다에 이르는 길을 내지 않는다 달빛도 별빛도 발길 끊어버린 번화가 포구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