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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휘 - 그날의 풍경시(詩)/시(詩) 2023. 10. 25. 19:08
터널을 나온 철로에서 총총 뛰어노는 참새들 아직 어린 것들이다 이별을 경험하지 못했겠다 저 나이쯤에 우린 수업을 빼먹고 야간열차를 탔다 엄마의 놀란 눈이 데굴데굴 기차를 따라왔지만 우릴 태운 기차는 콧노래를 부르며 다른 세상을 향해 달려갔다 창가에 희끗희끗 초라한 마을 몇 개를 세워두고 기차는 우릴 바닷가 작은 역에 내려 주었다 우린 모래밭에 앉아 추위와 허기를 참으며 아무나 볼 수 없다는 일출을 목격했다 그날의 풍경은 내 영혼 깊은 곳에서 가끔 나를 깨운다 그 바다의 숨결 한 자락이라도 만나보고 싶은 날 나는 나를 데리고 그날의 풍경을 찾아 간다 풍경은 그 자리에 남아 또 다른 풍경을 만들고 있다 빈 의자가 홀로 앉아 있다 사랑을 금기로 삼고 살아야 하는 의자에겐 어떤 사랑의 기억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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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 노천카페의 시간시(詩)/문정희 2023. 10. 13. 07:05
허물린 돌 더미 같은 저녁 시간 낯선 노천카페에 내가 앉아 있다 오랜만에 마스크를 벗었지만 미처 벗지 못한 두려움이 함께 앉아있다 모르는 사람이 곁으로 온다 그는 가만히 내 곁으로 오더니 선채로 자연스럽게 능숙하게 자기 손에 든 컵에다 새로 주문한 내 아이스커피를 따라 부었다 그리고 유유히 저쪽으로 사라졌다 노숙 차림이 바람 한 점 펄럭이지 않는다 저녁이 내려오는 노천카페의 시간 그것이 무엇이든 알아도 몰라도 좋다 새로 막 주문한 빈 컵을 앞에 놓고 낯선 노천카페에 내가 앉아 있다 (그림 : 송지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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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숙 - 까부는 일시(詩)/시(詩) 2023. 10. 13. 06:58
가을볕에 쪼그려 앉아 들깨를 까부는 엄마 키질의 낙차에서 안과 밖을 나눠주고 있다 한 되가 솟구쳐 공중을 빌릴 때 키의 안쪽으로 들어오는 알맹이들과 재빠르게 밀려나는 쭉정이들의 분류법, 그런 키질이 내게도 있었던가 까부는 일 바람 부는 날 꽃들도 키질을 한다 무거운 색은 꽃잎에 처지게 하고 가벼운 향기는 주위로 날려 버린다 무수한 낙차에서 키의 안쪽으로 나를 끌어당긴 엄마, 이제 알맹이만 남아 속 찬 마음에 기웃거리다보니 어느새 까부는 일이 잦아졌다 그럼에도 분간 없이 까불고 싶은 날, 지나가는 바람을 잡아놓고 한 번쯤은 쭉정이가 되고 싶다가도 모른 척 흩날리고 싶다가도 엄마를 생각하면 멈추게 된다 거느리는 일만으로도 힘든 무게였을 키질 속에서, 늦가을 쪽으로만 기울고 싶은 것이다 (그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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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현 - 민초(民草)시(詩)/시(詩) 2023. 9. 21. 15:58
보라, 눈부신 초록 물결! 폭풍이 불어도 사라지지 않는 초원! 가지가 꺾여도 끝끝내 푸르러 숲을 지키는 어린나무들, 한 방울 물이 바다를 이루듯이 한 알의 모래가 사막을 이루듯이 한 잎 풀이 초원이 되고 한 그루 나무가 큰 숲이 되었다 듣는가? 대하(大河)의 굽이치는 함성! 바다를 향해 가는 흰 물결의 용진을, 울부짖는 사자여, 달리는 폭풍이여 겸손히 엎드려라, 한 잎의 풀 앞에, 흐느껴라, 부러진 나무 앞에, 그가 초원이고 그가 숲이다 그가 백성이고 그가 주인이다 그들이 나라고 그들이 힘이다 (그림 : 김봉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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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아 - 오늘의 달력시(詩)/시(詩) 2023. 9. 13. 08:42
어제의 꿈을 오늘도 꾸었다 아무도 위로할 수 없는 절망의 바닥을 보았다 바닥 밑에 희망이 우글우글 숨어 있을 거라고 거짓말했다 한장을 넘겨보아도 똑같은 달의 연속이었다 못 하는 게 없는 것보다 어쨌거나 버티는 게 중요했다 바닥 밑에 바닥, 바닥 밑에 바닥이 있을 뿐이라고 그럼에도 우리는 바닥에 미세한 금들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보았다 바닥의 목소리가 뛰어올라 공중에서 사라질 때까지 당신의 박수 소리가 하늘 끝에서 별처럼 빛날 때까지 오늘도 달력을 넘기는 것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 당신의 애인에게서 내일의 꿈을 들었다 (그림 : 변응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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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서 - 안부시(詩)/시(詩) 2023. 9. 13. 08:27
해남 어디 방앗간에서 만들었다는 들기름 한 병 한동안 아까워 아껴 먹다 언제부터 잊고 지냈나 유통기한이 지나버렸다 막히지 않고 흘러가는 기름진 생도 아닌데 진득하게 고이는 기름이 기한이 있으면 또 어때? 김치라도 볶아서 두부에 올려 먹어야지 그렇게 한참이 지난 기한을 연명했고 결국 비워버린 들기름병을 버리지 않았어 버너 앞에 빈 병을 고이 놔두고 찌개라도 끓일 때 한 번씩 바라봤지 어느 날은 깨끗이 씻어 다시 빈 병만 올려놨지 들기름병에게 안부를 묻는다 퍽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고 너도 나처럼 속없이 잘도 살고 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