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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희 - 가끔 분수가 생각나지시(詩)/시(詩) 2023. 8. 30. 15:56
자기 분수를 모르는 분수가 있지 아무 잘못 없는 사람 나무라야 직성 풀리고 자신을 필요 이상 높이 생각하는 그런 푼수 적반하장도 유분수인 경우도 있지 어떻게 쏘아 올려야 할지 생각해야 할 분수 여름날 호숫가, 힘차게 솟구쳐 무지개 드리우며 내리는 분수를 보면 시어머니는 살아오며 흘렸던 눈물이라 말한다 저렇게 흐르는 물줄기만큼 남편이 관심 가져주면 좋겠다는 필리핀 새댁 같은 장소에서 바라보는 물줄기도 누군가 분수처럼 쏟아내는 눈물이었다가 더러 사랑을 갈망하는 염원의 종소리이기도 하지 (그림 : 박소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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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숙 - 오로라를 찾아서시(詩)/시(詩) 2023. 8. 30. 15:42
여전히 기다림의 시간이 흘러간다 여러 가지 색깔의 그러데이션을 이루는 하늘과 구름 사이의 비명처럼 보아줄 사람은 많은데 나타나지 않는 오로라처럼 밤이 몰려온다 밤이 빛날수록 빛도 빛난다고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감미로운 실크의 펄럭임 속에 온몸이 휘감기는 날 빛을 사냥하는 꿈을 꾼다 그것은 나의 나라에 갇혀 있는 보라색 고래 내가 갖게 된 상처 검은 어둠의 바다를 홀로 헤엄치는 사람 따라가고 싶었다 산책하는 별을 지나 그 별에 꽃을 건네는 다정으로 휘청이듯 걸어가는 눈보라 혹은 녹색의 잎을 걸어가는 달팽이처럼 두 손을 주었다 보이지 않아도 빛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마음 내가 놓친 모든 것들이 커튼처럼 펄럭이는 밤의 바다에 나는 입체적으로 숨어든다 하늘 속으로 천천히 떼를 지어 흘러가는 보라색 고래 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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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옥 - 안반데기시(詩)/시(詩) 2023. 8. 30. 15:32
서로가 없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달이 사라진 자리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건 목성이다 가을걷이가 막 끝난 고랭지 육백마지기 산마루 게으른 고집불통의 건축가가 짓다 말았을 너덜겅 밭두둑을 따라가면 해거리로 놀려둔 목초지 둔덕이 펼쳐지고 어스름에 붉은 칠이 바스러지는 헛간 벽 틈에 번지는 어둠 그 너머로 쏟아지는 은하수 어느 계곡으로는 양들이 떼를 지어 몰려가는가 지분거리다가도 우지끈 이마를 치받는 굉음 바람은 호주머니 속에서 맞잡은 손아귀 사이로 잦아드는데 언덕 너머 구름장 아래로 우박과 서리를 퍼부을 듯 별이 진다, 뿔 하나 돋지 않았을 밋밋한 이마 웅크리고 잠든 양들의 등성이에도 별은 지고 내 삶에도 언젠가 한 번쯤 간절한 기도가 있었다 다만 내 몫으로 두 손 마주 잡은 온기와 불빛들 나란히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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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경 - 깜빡, 속다시(詩)/시(詩) 2023. 8. 16. 16:59
입김을 따라 새어 나온 소주 냄새가 바람의 등에 업혀 골목골목 지문을 찍으면 한낮의 모서리들 소리 없이 둥글어진다 첫눈 내릴 때까지 커피나 마시면서 더 작아져야지 흘러내린 목소리를 추슬러 올리는 사이 화병 속 리시안셔스의 하얀 추파 - 모가지 잘려 여기까지 와서 활짝 웃으면 역마살 맞아 위로의 말까지 준비하는 쓸데없는 센스 조화(造花)의 은근슬쩍 능청은 무슨 조화(造化)? 마른 웃음 간간이 주고받는 풍경 너머로 비웃듯이 소공원을 지나가는 바람 도둑눈이라도 다녀갔으면 했다 (그림 : 이윤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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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옥주 - 시간을 갈아끼우다시(詩)/시(詩) 2023. 8. 16. 16:41
남포동 시계골목 늙은 시계 수리공이 어제의 뚜껑을 열고 시간을 갈아 끼운다 키클롭스의 눈알 같은 확대경이 방전된 시간의 지층을 들여다본다 나의 신탁(神託)은 완성될 것인가 톱니바퀴 사이로 깨어나길 기다리는 시침과 분침 내 청춘은 어느 봄날에 염을 해버린 것일까 오리엔트에서 걸어온 태양의 사제가 주문을 외운다 팽팽한 접전의 시각 백발을 날리는 시간의 대장장이가 태엽의 혈을 찌른다 그림자 겹쳐지는 빌딩 사이로 한 줄금 빛이 새어들고 내 손목에서 채깍채깍 맥박이 뛴다 (그림 : 예수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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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 종이배를 띄우고 싶었다시(詩)/시(詩) 2023. 8. 13. 20:48
티브이에 나오던 광고영상이 신기하기만 하던 시절 쥬시후레쉬인가하는 껌 선전에서 흰색의 예쁜 중절모를 쓴 처녀가 초록빛 시냇물 위에 종이배를 띄우는데 코스모스 한 송이를 태웠을 것이다 동승한 코스모스가 돛이 되어 흘러가다가 어디로 정착하였는지 결말을 보지 못하였음이 내내 궁금하였는데 코스모스는 해마다 피어 그 때 그 일을 기억하는 눈치여도 세월은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흘러만 갔을 뿐 빛깔도 바랜 어느 시인의 옛 시집에서 대야 위에 종이배를 띄우고 싶어졌다는 문장 하나로 그 때 그 종이배가 생각났으나 한 번도 귀 기울이지 못한 무심함으로 아직도 정착하지 못한 삶 그때는 그 여자처럼 예쁜 색종이로 접어 누군가에게 닿을 종이배를 띄우고 싶었다 적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시냇물을 타고 온 종이배의 사연을 알아차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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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호 - 보석상가시(詩)/전윤호 2023. 8. 13. 20:45
예전에 만났던 사람이 그리워 종로3가로 갔지 전화 한 통화에 일주일을 견디고 한 편의 영화를 보기 위해 비싼 표를 사던 단성사는 보석가게가 되어 있었네 히잡을 쓴 여자들이 휴대폰을 들고 다니는 저 골목은 우리가 연기 속에 삼겹살을 굽던 곳 이미 그는 없는데 나는 무엇을 보고 싶었던 건지 창덕궁으로 가는 길엔 화사한 한복 입은 아가씨들이 꽃처럼 날아다니고 빨간 점퍼가 서러운 노인들이 그늘에서 막걸리 마시는 종로3가에는 나를 닮은 유령이 가로수로 서 있고 그때는 그리도 답답했던 순간들이 환한 불빛 속에서 보석으로 반짝이고 있더군 (그림 : 양종석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