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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상학 - 북녘 거처
    시(詩)/안상학 2019. 11. 2. 12:59

     

    당신은 인생길에서 돌아가고 싶은 길목이 있습니까
    나는 갈수만 있다면 가고 싶은 길목이 있습니다만
    1978년 여름 한 달 살았던 불암산 아래 상계동 종점
    가짜 보석 반지를 찍어내던 프레스가 있던 작은 공장
    신개발 지구 허름한 사람들의 발걸음
    먼저 자리 잡고 프레스를 밟던 불알친구
    비만 오면 질척이던 골목 안 그 낮은 지붕 아래
    내가 살아본 이 세상 가장 먼 북녘의 거처
    돌아갈 수만 있다면 딱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그해 여름 안동역에서 청량리행 열차를 탄 열일곱 소년
    행복과는 거리가 먼 러셀의 책 한 권
    싸구려 야외전축 유행가 레코드판 몇 장
    세 번째 아내를 둔 아버지가 살던 셋방을 벗어난 까까머리
    전형처럼 후줄근하게 비는 내리고 청량리 앞 미주아파트
    식모 살던 동생이 남몰래 끓여준 라면 한 끼 훌쩍이던 식탁
    형제자매처럼 무학을 다짐하던 소년
    상계동 종점 창이 없는 그 집 열일곱 한 달
    그 어느 하루로라도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지금은 지하철 4호선 종점 당고개역 솟은 그 너머
    아배 편지 한 장 받아들고 눈물 찍으며 돌아섰던
    이제는 의지가지없는 그 곳
    불알친구는 십년 뒤 낙향하여 낙동강에 목숨을 흘려보냈고
    편지 한 장으로 나를 불러 내렸던 아배도 오래 전 소식 없고
    식모 살던 동생도 다른 하늘을 이고 산 지 오래
    열일곱 소년만 꼬박꼬박 혼자서만 나이 먹어가며
    이 낡은 남녘에서
    다 늦어 또다시 가출을 감행할 꿈을 꾸며
    그 북녘을 떠올려 봅니다만, 벌써부터 야외전축도 없고
    난 정말 몰랐었네 최병걸 레코드판도 없어진 지 오랩니다만,
    갈 수만 있다면 단 몇 시간만이라도
    내 삶의 가장 먼 북녘 거처로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당신
    당신은 인생길 어디 돌아가고 싶은 길목이 없습니까
    있다면 남녘입니까 북녘입니까
    북녘입니까 남녘입니까
    미안한 일인지 어떤지 나는 아직 그 북녘입니다만,
    당신, 당신들은 지금 어느 녘에 있습니까

    (그림 : 홍인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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