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길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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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호 - 그 노인이 지은 집시(詩)/길상호 2014. 4. 19. 12:01
그는 황량했던 마음을 다져 그 속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먼저 집 크기에 맞춰 단단한 바탕의 주춧돌 심고 세월에 알맞은 나이테의 소나무 기둥을 세웠다 기둥과 기둥 사이엔 휘파람으로 울던 가지들 엮어 채우고 붉게 잘 익은 황토와 잘게 썬 볏짚을 섞어 벽을 발랐다 벽이 마르면서 갈라진 틈새마다 스스스, 풀벌레 소리 곱게 대패질한 참나무로 마루를 깔고도 그 소리 그치지 않아 잠시 앉아서 쉴 때 바람은 나무의 결을 따라 불어가고 이마에 땀을 닦으며 그는 이제 지붕으로 올라갔다 비 올 때마다 빗소리 듣고자 양철 지붕을 떠올렸다가 늙으면 찾아갈 길 꿈길뿐인데 밤마다 그 길 젖을 것 같아 새가 뜨지 않도록 촘촘히 기왓장을 올렸다 그렇게 지붕이 완성되자 그 집, 집다운 모습이 드러나고 그는 이제 사람과 바람의 출입구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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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호 - 감자의 몸시(詩)/길상호 2014. 3. 30. 10:48
감자를 깎다 보면 칼이 비켜 가는 움푹한 웅덩이와 만난다 그곳이 감자가 세상을 만난 흔적이다 그 홈에 몸 맞췄을 돌멩이의 기억을 감자는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벼랑의 억센 뿌리들처럼 마음 단단히 먹으면 돌 하나 깨부수는 것 어렵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뜨거운 하지(夏至)의 태양에 잎 시들면서도 작은 돌 하나도 생명이라는 뿌리의 그 마음 마르지 않았다 세상 어떤 자리도 빌려서 살아가는 것일 뿐 자신의 소유는 없다는 것을 감자의 몸은 어두운 땅 속에서 깨달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웅덩이 속에 씨눈이 하나 옹글게 맺혀 있다 다시 세상에 탯줄 댈 씨눈이 옛 기억을 간직한 배꼽처럽 불거져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독을 가득 품은 것들이라고 시퍼런 칼날을 들이댈 것이다 (그림 : 조창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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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호 -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시(詩)/길상호 2014. 3. 30. 10:45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있으면 낮 동안 바람에 흔들리던 오동나무 잎들이 하나씩 지붕 덮는 소리, 그 소리의 파장에 밀려 나는 서서히 오동나무 안으로 들어선다 평생 깊은 우물을 끌어다 제 속에 허공을 넓히던 나무 스스로 우물이 되어버린 나무, 이 늦은 가을 새벽에 나는 그 젖은 꿈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그때부터 잎들은 제 속으로 지며 물결로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너도 이제 허공을 준비해야지 굳어 버린 네 마음의 심장부 파낼 수 있을 만큼 나이테를 그려 봐 삶의 뜨거운 눈물이 떨어질 때 잔잔한 파장으로 살아나는 우물, 너를 살게 하는 우물을 파는 거야 꿈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면 몇 개의 잎을 발자국으로 남기고 오동나무 저기 멀리 서 있는 것이다 (그림 : 장용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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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호 - 그녀의 실 감기시(詩)/길상호 2014. 3. 30. 10:43
어두운 방에서 그녀 실을 감는다 실타래 끝을 마른 발로 버티고 이편에서 건너편 세월을 오가며 기억을 정리중이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손에 하얀 실뭉치는 배가 부르다 그러나 가끔 손가락에 힘을 주어도 엉키어 따라오지 않는 기억도 있다 그때마다 실밥처럼 끊겨 나간 세월이 얼굴에 깊은 주름으로 남는다 주름이 얼굴에 수를 놓는다 한 올 한 올 가닥을 더듬어 보아도 풀리지 않는 그리움 같은 것, 그 뭉친 자리를 삭은 이로 끊으며 그녀 잠시 허리를 편다 그리고 끊은 자리 매듭으로 이으면서 삶의 상처 하나씩 딱지로 아문다 그녀의 살에 새롭게 돋아난 별들 어느새 창문으로 노을이 번지고 그녀, 생의 내면을 가로지르듯 실뭉치에 빛나는 바늘 하나 꽂는다 (그림 : 이희문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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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호 - 늦은 답장시(詩)/길상호 2014. 3. 2. 11:00
이사를 하고 나서야 답장을 씁니다 늦은 새벽 어두운 골목을 돌아 닿곤 하던 집 내 발자국 소리에 설핏 잠에서 깨어 바람 소리로 뒤척이던 나이 많은 감나무, 지난 가을 당신 계절에 붉게 물든 편지를 하루에도 몇 통씩 마루에 올려 놓곤 했지요 그 편지 봉하기 위해 버려야 했던 잎들은 모아 태워도 마당 가득 또 쌓여 있었습니다 나 그 마음도 모르고 편지 받아 읽는 밤이면 점점 눈멀어 점자를 읽듯 무딘 손끝으로 잎맥을 따라가곤 했지요 그러면 거기 내가 걸었던 길보다 더 많은 길 숨겨져 있어 무거운 생각을 지고 헤매기도 하였습니다 당신, 끝자리마다 환한 등불을 매달기 위해 답답한 마음으로 손을 뻗던 가지와 암벽에 막혀 울던 뿌리의 길도 보였습니다 외풍과 함께 잠들기 시작한 늦가을 그 편지는 제 속의 불길을 꺼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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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호 - 차 한잔시(詩)/길상호 2014. 2. 23. 16:17
수종사 차방에 앉아서 소리 없이 남한강 북한강의 결합을 바라보는 일 차통(茶桶)에서 마른 찻잎 덜어낼 때 귓밥처럼 쌓여 있던 잡음도 지워가는 일, 너무 뜨겁지도 않게 너무 차갑지도 않게 숙우(熟盂)에 마음 식혀내는 일, 빗소리와 그 사이 떠돌던 풍경소리도 타관(茶罐) 안에서 은은하게 우려내는 일, 차를 따르며 졸졸 물소리 마음의 먼지도 씻어내는 일, 깨끗하게 씻길 때까지 몇 번이고 찻물 어두운 내장 속에 흘려보내는 일, 퇴수기(退水器)에 찻잔을 헹구듯 입술의 헛된 말도 남은 찻물에 소독하고 다시 한번 먼 강 바라보는 일, 나는 오늘 수종사에 앉아 침묵을 배운다 (그림 : 설종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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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호 - 모르는 척, 아프다시(詩)/길상호 2014. 2. 15. 21:07
술 취해 전봇대에 대고 오줌 내갈기다가 씨팔씨팔 욕이 팔랑이며 입에 달라붙을 때에도 전깃줄은 모르는척, 아프다 꼬리 잘린 뱀처럼 참을 수 없어 수많은 길 방향 없이 떠돌 때에도 아프다 아프다 모르는 척, 너와 나의 집 사이 언제나 팽팽하게 긴장을 풀지 못하는 인연이란 게 있어서 때로는 축 늘어지고 싶어도 때로는 끊어버리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감전된 사랑이란 게 있어서 네가 없어도 나는 전깃줄 끝의 저린 고통을 받아 오늘도 모르는 척, 밥을 끓이고 불을 밝힌다 가끔 새벽녘 바람이 불면 우우웅..... 작은 울음소리 들리는 것도 같지만 그래도 인연은 모르는 척 (그림 : 장용길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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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호 - 수몰 지구시(詩)/길상호 2014. 1. 25. 22:50
물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마을, 나는 그 마을 이름도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물에 갇혀 있는 동안 모든 것이 허물어졌으므로 별다른 이름이 그곳에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유물처럼 남은 돌담들, 한때 가족의 삶을 지키던 성벽은 시퍼런 수압에 함락되고 장독의 파편이며, 여물통, 절구통, 저마다 훔푹 패인 가슴에 눈물을 담아 차마 울음은 삼키고 있었습니다. 피곤한 몸을 눕히던 구들장 아직도 반듯하게 햇살로 달구어져 따뜻한 꿈을 꾸는 모양인데 떠나간 사람들 모두 어디에서 행복할까요 세월이 물때처럼 층층이 쌓이면 사람도 하나씩 허물어지고 그들 또한 세월로 스미겠지요 여름이면 집집이 그늘로 덮어 주던 나무들 이제 뿌리도 썩고 애써 기억을 한 잎씩 붙여 놓아도 피어나지 못한다는 것 알았습니다. 장마가 지고 또다시 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