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성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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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 달 따러 가는 저녁시(詩)/성선경 2015. 4. 14. 16:44
어머니는 웃음 한번으로 어떻게 수천 두락의 논뙈기를 만들 수 있는지요 삿갓배미, 치마배미, 짚신배미 조각보처럼 박음질한 다랭이논 쫄래쫄래 따라오고요 하늘을 오르는 계단이 저렇게 주름졌나요 일렁거리는 벼 이삭들도 수수수수수 손주처럼 간지럼을 탑니다 굴참나무는 굴참나무끼리 너도밤나무는 너도밤나무끼리 제 그림자에 넋을 놓고 자빠졌을 때 개 꼬랑지에 휘휘 감기는 저 구름들 무슨 생각 저렇게 물들였나요 어머니 땀 좀 닦으셔요 수건을 건네자 일렁이는 하늘 세상이 참 환해집니다 (그림 : 심만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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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 장진주사(將進酒辭)시(詩)/성선경 2014. 9. 24. 23:29
살구꽃 피면 한 잔 하고 복숭아꽃 피면 한 잔 하고 애잔하기가 첫사랑 옷자락 같은 진달래 피면 한 잔 하고 명자꽃 피면 이사간 옆집 명자 생각난다고 한 잔 하고 세모시 적삼에 연적 같은 저 젖 봐라 목련이 핀다고 한 잔 하고 진다고 한 잔 하고 삼백예순날의 기다림 끝에 영랑의 모란이 진다고 한 잔하고 남도의 뱃사공 입맛에 도다리 맛들면 한 잔하고 봄 다 갔다고 한 잔 하고 여름 온다 한 잔 하고 초복 다름한다고 한 잔 하고 삼복 지난다고 한 잔 하고 국화꽃 피면 한 잔 하고 기울고 스러짐이 제 마음 같다고 한가위 달 보고 한 잔 하고 단풍 보러 간다고 한 잔 하고 개천은 개벽이라 하늘 열린다고 한 잔 하고 입동 소설에 첫눈 온다고 한 잔 하고 아직도 나는 젊다고 한 잔 하고 아랫목에 뒹굴다 옛시를 읽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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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 석류시(詩)/성선경 2014. 8. 29. 22:34
대나무 그늘이 짙은 외갓집 뒤란에서 한 평생을 늙어 아직도 하지 못한 말들이 보석처럼 박혔을 큰외숙모 나는 태어나 백일 전후 그 큰외숙모의 젖을 먹고 자랐다. 내 위로 외사촌 형이 한 분 아래로 나와의 한 살 터울 외사촌 여동생이 하나 그 사이에서 내 살겠다고 연꽃 같았을 외숙모의 젖을 악착같이 빨았을 나는 참 미운 덩굴이었을 텐데 이제 팔십이 내일 모레 한 노인이 되었어도 아들같이 나를 기다려 동동주를 담는다. 나는 모른 척 동동주 몇 잔에 술이 올라 불쑥 젖값이라 봉투 하나 내밀고 돌아오는데 언제 따셨는지 뒤란의 석류 하나 손 쥐어주며 길 가며 먹어라 속 파인 석류 같은 웃음 하 웃으신다. 참 보석은 늘 감추어진 곳에 있다 숨을 수 있는 가장 깊은 곳 숨길 수 있는 가장 깊은 곳 그 곳에 있다가 어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