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정호승
-
정호승 - 골목길시(詩)/정호승 2017. 3. 9. 17:26
그래도 나는 골목길이 좋다 서울 종로 피맛골 같은 골목길보다 도시 변두리 아직 재개발되지 않은 블록담이 이어져 있는 산동네 의정부 수락산 밑 천상병 시인의 집이 있던 그런 골목길이 좋다 담 밑에 키 큰 해바라기가 서 있고 개똥이 하늘을 쳐다보다가 소나기에 온몸을 다 적시는 그런 골목길이 좋다 내 어릴 때 살던 신천동 좁은 골목길처럼 전봇대 하나 비스듬히 서 있고 길모퉁이에 낡은 구멍가게가 하나쯤 있으면 더 좋다 주인 할머니가 고양이처럼 졸다가 부채를 부치다가 어머니 병환은 좀 어떠시냐고 라면 몇개 건네주는 그 가난의 손끝은 얼마나 소중한가 늦겠다고 어서 다녀오라고 너무 늦었다고 어서 오라고 안아주던 어머니의 그리운 손은 이제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어느 술꾼이 노상방뇨하고 지나가는 내 인생의 골목길이..
-
정호승 - 종착역시(詩)/정호승 2017. 2. 18. 17:36
종착역에 내리면 술집이 있다 바다가 보이는 푸른 술집이 있다 술집의 벽에는 고래 한 마리 수평선 위로 치솟아 오른다 사람들은 기차에서 내리지 않고 종착역이 출발역이 되기를 평생 기다린다 나는 가방을 들고 기차에서 내려 술집의 벽에 그려진 향유고래와 술을 마신다 매일 죽는게 사는 것 이라고 필요한 것은 하고 원하는 것은 하지 말라고 고래가 잔을 건낼 때마다 술에 취한다 풀잎끝에 앉아있어야 아침이슬이 아름답듯이 고래 한마리 수평선 끝으로 치솟아 올라야 바다가 아름답듯이 기차도 종착역에 도착해야 아름답다 사람도 종착역에 내려야 아름답다 (그림 : 노태웅 화백)
-
정호승 - 낡은 의자를 위한 저녁기도시(詩)/정호승 2017. 2. 7. 12:45
그동안 내가 앉아 있었던 의자들은 모두 나무가 되기를 더이상 봄이 오지 않아도 의자마다 싱싱한 뿌리가 돋아 땅속 깊이깊이 실뿌리를 내리기를 실뿌리에 매달린 눈물들은 두 작은 미소가 되어 복사꽃처럼 환하게 땅속을 밝히기를 그동안 내가 살아오는 동안 앉아 있었던 의자들은 모두 플라타너스 잎새처럼 고요히 바람에 흔들리기를 더이상 새들이 날아오지 않아도 높게 높게 가지를 뻗어 별들이 쉬어가는 숲이 되기를 쉬어가는 별마다 새가 되기를 나는 왜 당신의 가난한 의자가 되어주지 못하고 당신의 의자에만 앉으려고 허둥지둥 달려왔는지 나는 왜 당신의 의자 한번 고쳐주지 못하고 부서진 의자를 다시 부수고 말았는지 산다는 것은 결국 낡은 의자 하나 차지하는 일이었을 뿐 작고 낡은 의자에 한번 앉았다가 일어나는 일이었을 뿐 (그..
-
정호승 - 정동진시(詩)/정호승 2017. 2. 1. 09:45
밤을 다하여 우리가 태백을 넘어온 까닭은 무엇인가 밤을 다하여 우리가 새벽에 닿은 까닭은 무엇인가 수평선 너머로 우리가 타고 온 기차를 떠나보내고 우리는 각자 가슴을 맞대고 새벽 바다를 바라본다 해가 떠오른다 해는 바다 위로 막 떠오르는 순간에는 바라볼 수 있어도 상큼 떠오르고 나면 눈부셔 바라볼 수가 없다 그렇다 우리가 누가 누구의 해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서로의 햇살이 될 수 있을 뿐 우리는 다만 서로의 파도가 될 수 있을 뿐 누가 누구의 바다가 될 수 있겠는가 바다에 빠진 기차가 다시 일어나 해안선과 나란히 달린다 우리가 지금 다정하게 철길 옆 해변가로 팔짱을 끼고 걷는다 해도 언제까지 함께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있겠는가 동해를 향해 있는 저 소나무를 보라 바다에 한쪽 어깨를 지친 듯이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