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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은 - 해연풍
    시(詩)/고 은 2014. 6. 23. 11:30

     

     

    옛노래는 누가 지었는지 모르고 노래만 남아 있다.
    저녁 풀밭이 말라서 비린 풀 냄새가 일어나고
    처음부터 말떼는 조심스럽게 돌아온다.
    여러 산들은 제가끔 노을을 받아 혹은 가깝고 혹은 멀다.
    또한 마을처녀가 밭에서 숨지는 햇살을 가장 넓은 등에 받고
    이 고장에서 자라 이 고장에서 시집갈 일밖에는 생각지 않는다.

     

    아무리 어제의 뭉게구름이 그토록 아름다왔을지라도
    그 구름은 오늘 바라볼 수 없으며 벌은 날아가다 죽는다.

    이 땅에 묻힌 옛피가 하루하루를 그들에게 가르치며……
    아직 밭 일꾼과 귀 작은 소떼와 처녀들이 돌아오지 않은 채
    화북(禾北) 마을의 갈치배는 희미꾸레한 돛을 올리고
    제 마음에 따라 다른 바다를, 그러나 한마음으로 떠난다.
    옛노래는 누가 지었는지 모르고 노래만 남아 있으며,
    바다는 좀더 북쪽 별 나타날 곳으로 기울었는지
    성산포(城山浦) 우도(牛島)배와 마주친 배들은 나비처럼 떠나간다.


    그러나 먼 상하이는 밝을 것이고 서쪽 바다의 지평선엔
    가까스로 돌아오는 애월(涯月)배들이 날카롭게 솟아 있고,
    지는 해를 등지며 때로 바다는 오늘같이 인자하구나.
    저 저녁 바다로 떠나지 않고 밭에서 돌아온 자여, 맞이하라.
    비로소 해연풍(海軟風)은 노는 애들과 그대 적막한 가슴 앞을 적시고
    이 고장의 질긴 협죽도(夾竹桃)꽃들을 마지막에 적시리라.

    어느 돌담 앞에나 옛 노래인양 감태 잎새와 소라 껍데기가 있어도
    가장 풍요한 빈 손으로 이 땅을 떠나지 않게 하고
    저 깊은 밤 바다 위에서는 이미 별이 빛나기 시작하며
    어여쁜 갈치 아씨가 잡혀 하느님처럼 실려 오리라.
    밤은 알리라. 더구나 저 바다의 밤은 알고 있으리라.
    어제는 사시나무였고 오늘은 마른 살 가죽에서 저물고

    비로소 해연풍(海軟風)은 아득한 밤배 불빛을 씻어 오리라.

    해연풍(海軟風) : 바다에서 육지바람(같은 말 : 해풍)

    (그림 : 설종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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