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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 모 심는 날시(詩)/고 은 2014. 6. 23. 11:16
못자리 하고 본잎 나왔을 때 비닐 걷고 모판 바람 쏘일 때
모 쪄다가 모내기할 때 그 모 무럭무럭 자라나는 한더위 때
이윽고 황금물결 이루어 가을걷이 다가올 때 나락 벨 때
이 논농사로 먹은 것 없고 입은 것 없고 누릴 것 없이도
농사꾼은 능히 하늘에 있고 땅속 깊이 스며서 에렐루 상사디야
온갖 걱정 두고도 이토록 아비 어미 된 기쁨 어디 가랴
볍씨 담가 이렛동안 불려서 조심조심 방 아랫목에 싹 틔우며
이것이 어찌 태어나 쌀 되랴 했건만 보온못자리 잎새 나왔다
5월 들어 비닐 걷으니 파란 모 바깥 세상에 나왔다
이 기쁨으로 지내다가 마정리 중터 삼모네와 삼모네 큰집
치욱이네와 용술이 처가집해서 네 집이나 같은 날 모 심는 날이구나
모 심는 날이래야 이제는 사람 열 여섯 열 아홉 놉 얻지 않고
그저 이앙기 한 대가 모 모가지까지 꽂으면 되는 세상
그것도 한나절이면 웬만한 논배미야 진작 모내기 끝나 버린다
중터 사람들의 논도 버드실들이고 가죽우물골의 논도
내리 부암리 삼암리 논도 다 버드실들을 이루고 있구나
엣따 버드실들 넓은 들 한천의 물이 갈라서 두 개로구나
이쪽 저쪽 대번에 모 심은 논으로 바꾸어서 살아났구나
긴 겨울 내내 흙 바닥으로 잘도 견디어 내고
이제 모 심고 모 자라야 제 할 일 하는 나라가 아니냐
송화가루 날리는데 영농자금 뒤늦게 찔끔 나와 보아야
서로 급하니 누구 하나 한몫으로 가져가도 성에 안 찬다
재산세 5천 원 되어야 일반자금 타낼 수 있는데
당최 농협이란 데가 병같이 쓰고 약같이 쓴 데가 돼 놓아서
농촌이 차 타고 바라보면 아무 일 없이 잘 되는 듯 하건만
정작 아무개야 단 하루 세끼 살아 보아라 석탄 백탄 다 탄단다
삼암리 진태는 군대 가서 배운 운전기술로 트럭 타니
진태 하나 보고 몇십 년 수절한 진태 어머니 땡감 같은 어머니
어느덧 흰 머리 양귀비 물들여서 뻔지르 검지만
몸은 옛 몸 아니라 거동도 수월할 때가 드물고말고
논 닷 마지기 모 심으니 마침 밥 때라 밥 이어 나르고 있다
삼대 며느리 잘 들어앉아야지 오사바사한 년 아니고 말이지
삼대는 고사하고 진태가 돌아와 어서 장가나 들어야 할텐데
장가 가던 머리로 떡두꺼비 같은 손자놈 하나 얼뚱아기 하나
평생 허전했던 품에 안고 두둥실 두둥실 떠나가 봐야 할텐데(그림 : 김대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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