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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 거름 내는 날시(詩)/고 은 2014. 6. 23. 11:08
내 앞에서 자란 자식
벌써 코밑에 잔털 난 자식
쇳내 나는 이놈 데리고
경운기 함께 탄다
아랫뜸 지나
꽤나 먼 길 거름을 낸다
갓난이때 잘도 보채던 놈이
이제는 입이 굼떠
별반 성난 듯이 말도 없다
이놈하고 가다가
상묵이네 논 둔치에서
까딱 엎어질 뻔했다가도
용케 경운기 손잡이 잘 휘어 잡았다
추운 날도 느린 새는 느리게 난다
사뭇 점잖다
우리 짚뭇은 다 들여가고
다른 집 짚벼눌이 더러 논에 있다
올해는 객토 못하는 대신
여름내 만든 퇴비거름
맛있는 거름
논에 내니
논 좀 보아라
논이 헤헤 입 벌리고 좋아한다
남의 논들이야
너무 일직 방정떤다 할지 모르나
우리 논이 좋아하니
나도 내 자식도 함께 좋구나
하늘이야 높아서 소 닭 보듯 하고
다섯 번 거름 실어내면
한나절이 넘어서
거름냄새 퀴퀴 쩐 몸으로
비로소 내 자식 입을 연다
아버지
내년 절충못자리는 내가 할께요
어느덧 덧없구나 내 자식이 자식 아니다
나와 내 자식 이 들판에서 비로소 나란히 형제다어서 가자 가서 술 한잔 주고받자
(그림 : 장정근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