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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저물자 라일락 꽃나무가 내게로 왔다
길의 바깥쪽으로 기운 것은 추억이었는데
몸이 아팠다 두리번거리며 찿아보아도
사람들로 어두워진 길에서 꽃나무는 여전히
보이지가 않았다 밤은 오직 깊어만 갔다
봄날의 여러 저녁 무렵 나는 늘 외로웠으나
스쳐가는 그 고독을 기억하지 못하고
흩날리는 벚꽃잎 사이의 밤으로
걸어 들어가고는 하였다 내일은 아름다워서
더욱 위험하였다 방법이 없었다
라일락 꽃향기가 밤에 더 짙어지는 이유를
모두 알았지만 아무도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줄곧 한 방향으로 걸으면서
내가 만난 꽃들을 노래했다 절망의 뿌리와
분노의 가지 두려움에 떠는 잎들에 대해서는
모른 체했다 생이 우리의 머리카락을
뒤로 날릴 때 꽃은 어김없이 바람에 지고
라일락 잎을 씹으며 배우던 사랑도 낡아갔다
오랫동안 봄밤은 창백했으나 오늘밤
나는 여기에 있다 가까운 어딘가에
그 나무가 있고 나의 추억은
어디로도 흘러 가지 않는다(그림 : 진상용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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