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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폭설, 그 흐릿한 길시(詩)/심재휘 2019. 1. 11. 17:53
아주 떠나버리려는 듯
가다가 다시 돌아와 소리 없이 우는 듯이
눈이 내린다
어깨를 들썩거리다가 뛰어가다가 뒤돌아서서
폭설이 퍼붓는 길이다 그러면 이런 날은
붉은 신호등에도 길을 건너가버린 그 사랑이
겨우 보이도록 흐릿해져서
이런 날은 도무지 아프지가 않다
부풀어오른 습설이 거리에 온통 너무 흩날려
이편과 저편의 경계가 지워진 횡단보도는
건너지 않는 자들도 그냥 가슴에 품을 만하다
길 옆 나무가 내게 손을 내미는지
내게서 손을 거두어가는지 알 필요가 없고
휘청거리는 저녁은 어디쯤에 있는지
이별은 푸른 등을 켰는지
분간할 필요도 없어서
그저 떨어지는 빗금들이 뒤엉켜 서로의 빗금을 지울 때
흐릿한, 모든 것들, 사이에, 쓰다 만 글자처럼 서 있으면
그날의 윤곽은 악보 없이 부르는 나지막한 노래 같아서
눈코입이 뭉개어진 이런 날은 오래도록 아프지가 않다(그림 : 김종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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