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심재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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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낱.말.혼.자시(詩)/심재휘 2020. 6. 22. 17:28
손톱깍이를 찾으러 서랍을 열어놓고는 손은 왜 바싹 마른 만년필에 가닿았을까 긴 편지를 쓰던 날들이 서랍 구석에 처박혀 있는 오늘은 하필 이토록 백지 같은 유월이고 뚜껑을 열고 닫는 일들을 지겹게만 여기고는 버려두었던 만년필 가여워하게 될 줄을 몰랐다 만년필에 잉크를 넣고 혼자라고 쓴다 몇 번의 빈 혼자 끝에 까맣게 선명해지는 혼자 혼 자와 자 자를 가깝게 붙여 쓰면서 자꾸 소리 내보면 뜻은 사라지고 목소리와 필체로만 남는 혼자는 처음 보는 낯선 자세 같기만 해지다가 만져질 것도 같은 따뜻한 몸들이 된다 종이 한 바닥 낭자한 혼 자와 자 자는 제 몸에는 깊숙이 스미되 끝내 서로 번지지 못하는 수천 년이 가도 변함없는 생의 자세 아무리 붙여 써봐도 결국 혼자가 되는 만년필로 써보는 혼자라는 낱말 (그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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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가슴 선반시(詩)/심재휘 2020. 2. 15. 16:24
가슴 언저리에 선반을 달고 그곳에 당신을 위한 차 한 잔을 얹어드리지요 식기 전에 와서 드시면 나는 강바닥에 닻을 내린 작은 배 흘러가는 강물에 묶인 몸 일렁거려도 흘러간 것들을 돌아볼 수는 없어도 내가 읽는 책 속에서 새들은 씨앗인 듯 몇 개의 식지 않은 글자들을 물고 가겠지요 어느 훗날 쓸쓸한 거리에서 차를 다 마신 표정의 나무를 만난다면 가지 끝에 달린 꽃의 문장이 내 표정을 만날 때 당신이 마시고 간 차 한 잔의 인사라고 생각할게요 나는 오늘도 가슴에 선반을 달고 그곳에 차 한 잔을 올릴게요 매번 식어만 가는 차일지라도 차를 우리는 일은 우리의 일이잖아요 (그림 : 설종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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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경주시(詩)/심재휘 2019. 9. 25. 11:12
가을 경주에게는 불국사로 간다는 버스가 있어서 낙서하듯 몸 하나가 덜컹거려도 긴 이야기가 된다 지나쳐온 정류장들도 기와를 얹은 집 모양을 하고 있다 낯선 길에 내려 찡그린 얼굴을 햇살에 새기면 시월은 몇 층짜리인지 헐리지 않도록 바람 속에 쌓은 돌 그 돌 위에 돌을 쌓으며 좁아져가는 생애가 내 발자국들을 죄다 모아서 석탑 위에 얹어준다 내 이름은 탑이 가리키는 곳으로 올라갈 만하다고 하지만 박모의 하늘에 매일 조금씩 덧칠해온 얼룩 하나가 붉게 떠서 오늘밤에 나는 불국에 이르지 못하고 왕릉 곁의 막걸리집에 국물 자국처럼 앉으면 경주의 밤은 속을 알 수도 없는 탁한 술을 마신다 깊어가는 어둠을 시큼하게라도 맡을 수 있는 곳 평생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입 밖으로 뱉지 못한 말뿐이란 걸 흠집이 많은 술집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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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밑줄을 긋지는 않았지만시(詩)/심재휘 2019. 7. 21. 13:12
장마가 끝난 하늘은 너무 맑아서 구름 한 점인 것이 드러난 구름 감추어둔 말을 들켜버린 저 한 줌의 옅은 구름 전하지 못한 말들을 버리지도 못하고 너무 멀리 흘러와 버렸구나 괄호 속에 혼자말을 심고 꽃피지 못하는 말들에게 가시 같은 안대를 씌워야 했구나 차라리 폭풍의 지난밤이 견딜 만했겠다 천둥소리로 가슴을 찢고 자진할 만했겠다 하지만 장마 갠 하늘에 흩어지지 못한 구름 한 점이여 숨을 데 없는 하늘에 들켜버린 마음이여 너무 넓은 고요를 흘러가다가 뒤를 돌아 볼까봐 구름에게 나는 몇 마디 중얼거려 본다 마지막 사흘을 퍼붓던 비가 그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토록 푸른 하늘이라면 이제는 페이지의 접혀 있던 귀를 펴야 할 때 밑줄을 긋지는 않았지만 그 문장들 아래 없는 밑줄도 이제는 지워야 할 때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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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영월시(詩)/심재휘 2019. 2. 21. 10:15
새벽에 깨어 다시 잠들지 못할 때 갈 데 없는 혼잣말처럼 영월은 몸이 추웠다 생각해보면 그 언젠가도 동강을 따라 가파른 기슭의 성한 곳 없는 곡조를 긁어며 기차가 지나갔던 것인데 강 건너 철궤를 따라 멀어지는 이별이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남몰래 들어와 혼자 읽어보는 영월은 수많은 모퉁이를 휘돌아나가기에 바쁜 물굽이여서 언제나 잠깐의 뒷모습뿐이었다 설령 떠나간 기차를 앞질러가 뒤돌아본다 해도 다가오는 이별의 순간은 객차에 실린 운명의 얼굴은 언제나 산모퉁이에 가려져 있었다 누구나 영월에 갈 수는 있어도 아무도 모퉁이 없는 영월은 가질 수는 없었다 (그림 : 김지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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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위로의 정본시(詩)/심재휘 2019. 2. 20. 18:44
언듯언듯 라일락 꽃향기가 있어서 사월 한낮의 그 가지 밑을 찾아가 올려다보면 웬걸, 향기는 오히려 사라지고 맑은 하늘뿐이지 다정함을 잃고 나무 그늘 아래를 걸어나올 때 열없이 열 걸음을 멀어져갈 때 슬며시 다가와 등을 어루만져주는 그 꽃의 향기 술에 취해 집으로 드는 봄밤이라면 기댈 데 없이 가난한 제 발소리의 드문드문한 냄새를 맡다가 문득 만나게 되지 곁에서 열 걸음을 함께 걸어가주는 그 꽃, 향기 놀라서 두리번거리면 숨어서 보고만 있는지 그저 어둠 속 어딘가의 라일락 나무 그리하여 비가 세찬 날 그 나무 아래를 우산도 없이 지나간다면 젖은 걸음을 세워 그 꽃나무 아래에 잠시 머무른다면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향기를 배우게 되지 젖은 제 온몸으로 더 젖은 마음을 흠뻑 닦아주는 그 꽃의 향기 어디로도 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