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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위로의 정본시(詩)/심재휘 2019. 2. 20. 18:44
언듯언듯 라일락 꽃향기가 있어서
사월 한낮의 그 가지 밑을 찾아가 올려다보면
웬걸, 향기는 오히려 사라지고 맑은 하늘뿐이지
다정함을 잃고 나무 그늘 아래를 걸어나올 때
열없이 열 걸음을 멀어져갈 때
슬며시 다가와 등을 어루만져주는 그 꽃의 향기
술에 취해 집으로 드는 봄밤이라면
기댈 데 없이 가난한 제 발소리의
드문드문한 냄새를 맡다가 문득 만나게 되지
곁에서 열 걸음을 함께 걸어가주는 그 꽃, 향기
놀라서 두리번거리면 숨어서 보고만 있는지
그저 어둠 속 어딘가의 라일락 나무
그리하여 비가 세찬 날
그 나무 아래를 우산도 없이 지나간다면
젖은 걸음을 세워 그 꽃나무 아래에 잠시 머무른다면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향기를 배우게 되지
젖은 제 온몸으로 더 젖은 마음을
흠뻑 닦아주는 그 꽃의 향기
어디로도 흩어지지 않는 이런 게 진짜 위로지(그림 : 이금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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