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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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 한밤으로시(詩)/황동규 2014. 8. 24. 07:44
우리 헤어질 땐 서로 가는 곳을 말하지 말자. 너에게는 나를 떠나버릴 힘만을 너에게는 그걸 노래부를 힘만을. 눈이 왔다, 열한시 펑펑 눈이 왔다, 열한시. 창밖에는 상록수들 눈에 덮이고 무엇보다도 희고 아름다운 밤 거기에 내 검은 머리를 들이밀리. 눈이 왔다. 열두시 눈이 왔다, 모든 소리들 입다물었다. 열두시 너의 일생에 이처럼 고요한 헤어짐이 있었나 보라 자물쇠 소리를 내지 말아라 열어두자 이 고요 속에 우리의 헤어짐을. 한시 어디 돌이킬 수 없는 길 가는 청춘을 낭비할 만큼 부유한 자 있으리오 어디 이 청춘의 한 모퉁이를 종종 걸음칠 만큼 가난 한 자 있으리오 조용하다 이모든 것은. 두시 두시 말해보라 무엇인가 되고 싶은 너를. 밤새 오는 눈, 그것을 맞는 길 그리고 등을 잡고 섰는 나 말해보라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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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 겨울밤 노래시(詩)/황동규 2014. 8. 21. 13:17
조금이라도 남은 기쁨은 버리지를 못하던 해 지는 언덕을 오를 때면 서로 잡고 웃던 해서 눈물겹던 사내여 오라. 우리 같이 흰 흙을 핥던 오후에는 배가 안 고프고 언덕에서 내려뵈던 깊은 황혼 캄캄하게 그 황혼 속을 달려가던 사내여 오라. 겨울날 빈터에 몰려오는 바람소리 그 밑에 엎드려 얼음으로 목을 축이고 얼어붙은 못 가에 등을 들판으로 돌리고 서서 못 속에 있는 우리의 마음을 바라볼 때 몸과 함께 울던 우리의 옷을 보라.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손 그 떨리는 손에는 네 목을 잡고 머리칼 날리며 빙판에 서서 서로 마주 보며 네 목을 잡고 내 들려주리 쓰러지지 않았던 쓰러지지 않았던 사내의 웃음을. 어둡다 말하면 대답소리 들리는 쇳날을 만지면 살이 떨어지는 그런 떨리는 노래는 이제 우리에게. 서로 붙잡은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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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 오어사(吾魚寺)에 가서 원효를 만나다시(詩)/황동규 2014. 1. 2. 11:52
1 오어사에 가려면 포항에서 한참 놀아야 한다. 원효가 친구들과 천렵을 즐기던 절에 곧장 가다니? 바보같이 녹슨 바다도 보고 화물선들이 자신의 내장을 꺼내는 동안 해물잡탕도 먹어야 한다. 잡탕집 골목 허름한 술집에 들어가 그곳 특산 정어리과(科) 생선 말린 과메기를 북북 찢어 고추장에 찍어 먹고 금복주로 입 안을 헹궈야 한다. 그에 앞서 잡탕집 이름만 갖고 포항 시내를 헤매야 한다. 앞서 한번 멈췄던 곳에 다시 차를 멈추고 물으면 또 다른 방향, 포기할 때쯤 요행 그 집 아는 택시 기사를 만난다. 포항역 근처의 골목 형편은 머리 깎았다 기르고 다음엔 깎지도 기르지도 않은 원효의 생애만큼이나 복잡하고 엉성하다. 2 허나 헤맴 없는 인간의 길 어디 있는가? 무엇이 밤 두시에 우리를 깨어 있게 했는가? 무엇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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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 가을날, 다행이다시(詩)/황동규 2013. 12. 30. 11:24
며칠내 가랑잎 연이어 땅에 떨어져 구르고 나무에 아직 붙어 있는 이파리들은 오그라들어 안 보이던 건너편 풍경이 눈앞에 뜨면 하늘에 햇기러기들 돋는다. 냇가 나무엔 지난여름 홍수에 실려 온 부러진 나뭇가지 몇 걸려 있고 찢겨진 천 조각 몇 점 되살아나 팔락이고 있다. 쥐어박듯 찢겨져도 사라지긴 어렵다. 찢겨져도 내쳐 숨쉰다. 검푸른 하늘에 기러기들 돌아온다. 다행이다. 오다 말고 되돌아가는 놈은 아직 없다. 오다 말고 되돌아가는 하루도 아직은 없다. 오늘은 강이 휘돌며 모래 부리고 몸을 펴는 곳 나그네새들과 헤어진 일 감춰둔 곳을 찾아보리라. (그림 : 하종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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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 얼음꽃시(詩)/황동규 2013. 12. 30. 11:18
찬 서리 흰 별빛처럼 내린 아침, 커피 한잔 없이 들숨날숨만 데리고 얼음꽃 황홀하게 핀 나무들 사이를 걸었습니다. 추위가 회칼 같은 것으로 제 생살 저미듯 환히 피운 꽃 마음의 살을 막 저미는 꽃, 허나 걷다가 어디쯤서 뒤돌아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시듦도 떨어짐도 없이 지워져 있는 꽃. 눈에 하얀 고리 무늬를 그린 동박새가 눈가루를 뿌리며 납니다. 햇빛이 갑자기 가루로 빛납니다. 눈 알갱이 하나하나에 뛰어들어 사라지는 빛의 입자들, 만난 것 채 알아채기도 전에 벌써 오늘 그리운 얼굴이 찰칵! 방금 눈앞에서 옛 그리움이 되는 꽃. (그림 : 김한연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