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천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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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오래된 농담시(詩)/천양희 2015. 7. 7. 22:53
회화나무 그늘 몇평 받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아내가 깊은 숨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합환수 가지끝을 보다 신혼의 첫밤을 기억해 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그늘보다 몇평이나 더 뚱뚱해져선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 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더 깊어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 되 얻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남편이 깊은 숨 몰아 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끝을 보다 자식농사 풍성하던 그날을 기억해낸 늙은 아내가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열매보다 몇 알이나 더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에 바람 들어갔지 양심은 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 밖에 두 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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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불멸의 명작시(詩)/천양희 2015. 7. 7. 18:00
누가 바다에 대해 말하라면 나는 바닥부터 말하겠네 바닥 치고 올라간 물길 수직으로 치솟을 때 모래밭에 모로 누워 하늘에 밑줄 친 수평선을 보겠네 수평선을 보다 재미도 의미도 없이 산 사람 하나 소리쳐 부르겠네 부르다 지치면 나는 물결처럼 기우뚱하겠네 누가 또 바다에 대해 다시 말하라면 나는 대책없이 파도는 내 전율이라고 쓰고 말겠네 누구도 받아쓸 수없는 대하소설 같은 것 정말로 나는 저 활짝 펼친 눈부신 책에 견줄 만한 걸작을 본 적 없노라고 쓰고야 말겠네 왔다갔다 하는 게 인생이라고 물살은 거품 물고 철썩이겠지만 철석같이 믿을 수 있는 건 바다뿐이라고 해안선은 슬며시 일러주겠지만 마침내 나는 밀려오는 감동에 빠지고 말겠네 (그림 : 이금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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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기차를 기다리며시(詩)/천양희 2015. 7. 7. 17:27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긴 길인지 얼마나 서러운 평생의 평행선인지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차역은 또 얼마나 긴 기차를 밀었는지 철길은 저렇게 기차를 견디느라 말이 없고 기차는 또 누구의 생에 시동을 걸었는지 덜컹거린다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차를 기다리는 일이 기차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며 쏘아버린 화살이며 내뱉은 말이 지나간 기차처럼 지나가버린다 기차는 영원한 디아스포라, 정처가 없다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기차역이 있는지 얼마나 많은 기차역을 지나간 기차인지 얼마나 많은 기차를 지나친 나였는지 한 번도 내 것인 적 없는 것들이여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지나간 기차가 나를 깨운다 기차를 기다리는 건 수없이 기차역을 뒤에 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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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오래된 골목시(詩)/천양희 2015. 7. 7. 17:26
길동 뒷길을 몇번 돌았다 옛집 찾으려다 다다른 막다른 길 골목은 왜 막다르기만 한 것일까 골과 목이 콱 막히는 것 같아 엉거주춤 나는 길 안에 섰다 골을 넘어가고 싶은 목을 넘어가고 싶은 골목이 담장 너머 높은 집들을 올려다본다 올려다볼 것은 저게 아닌데 높은 것이 다 좋은 건 아니라고 낮은 지붕들이 중얼거린다 나는 잠시 골목 끝에 서서 오래된 것은 오래되어서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래된 친구 오래된 나무 오래된 미래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나무가 미래일까 미래도 없이 우린 너무 오래 되었다. 오래된 몸이 막다른 골목 같아 오래된 나무 아래 오래 앉아본다 세상의 나무들 모두 무우수(無優樹)같아 그 자리 비켜갈 수 없다 나는 아직 걱정 없이 산 적 없어 무우(無憂) 무우 하다 우우, 우울해진다 그러나 길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