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천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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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우표 한 장 붙여서시(詩)/천양희 2014. 2. 10. 17:12
꽃 필 때 널 보내고도 나는 살아남아 창모서리에 든 봄볕을 따다가 우표한장 붙였다 길을 가다가 우체통이 보이면 마음을 부치고 돌아서려고 내가 나인 것이 너무 무거워서 어제는 몇 정거장을 지나쳤다 내 침묵이 움직이지않는 네 슬픔같아 떨어진 후박잎을 우산처럼 쓰고 빗속을 지나간다 저 빗소리로 세상은 여위어가고 미움도 늙어 허리가 굽었다. 꽃 질 때 널 잃고도 나는 살아남아 은사시나무 잎사귀처럼 가늘게 떨면서 쓸쓸함이 다른 쓸쓸함을 알아 볼 때까지 험한 내 저녁이 백년처럼 길었다 오늘은 누가 내 속에서 찌륵찌륵 울고 있다. 마음이 궁벽해서 새벽을 불렀으나 새벽이 새, 벽이 될 때도 없지 않았다 그럴 때 사랑은 만인의 눈을 뜨게 한 한사람의 눈 먼 자를 생각한다 누가 다른사람 나만큼 사랑한 적 있나 누가 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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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마음의 수수밭시(詩)/천양희 2014. 2. 7. 10:27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잎 몇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 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 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 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 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 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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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지나간다시(詩)/천양희 2014. 1. 11. 13:40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고 벼르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세상은 그래도 살 가치가 있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지나간 것은 그리워 진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사랑은 그래도 할 가치가 있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절망은 희망으로 이긴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슬픔은 그래도 힘이 된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가치있는 것만이 무게가 있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사소한 것들이 그래도 세상을 바꾼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바람소리 더 잘들으려고 눈을 감는다 '이로써 내 일생은 좋았다'고 말할 수 없어 눈을 감는다 (그림 : 장용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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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참 좋은 말시(詩)/천양희 2014. 1. 8. 18:11
내 몸에서 가장 강한 것은 혀 한잎의 혀로 참, 좋은 말을 쓴다 미소를 한 육백개나 가지고 싶다는 말 네가 웃는 것으로 세상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 오늘 죽을 사람처럼 사랑하라는 말 내 마음에서 가장 강한 것은 슬픔 한줄기의 슬픔으로 참, 좋은 말의 힘이 된다 바닥이 없다면 하늘도 없다는 말 물방울 작지만 큰 그릇 채운다는 말 짧은 노래는 후렴이 없다는 말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말 한송이의 말로 참, 좋은 말을 꽃피운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란 말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말 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꾸 온다는 말 (그림 : 남택수 화백) (낭송 : 황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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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나무에 대한 생각시(詩)/천양희 2014. 1. 8. 18:10
오래된 나무를 보면 삶 속의 나이테가 보인다 줄기는 줄어들고 뿌리만 깊다 사는 게 이런 거였나 중얼거린다 도대체 뿌리가 어디까지 갔기에 가도 가도 뿌리내리지 못하는지 참을 수 없이 가볍게 살고 싶지만 삶이 덜컥, 뿌리 뽑히는 것 같아 무지하게 겁이 난다 마지막이란 그렇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닐테지 나무 중에서 제일 굽은 나무들도 이름 모를 잡목들도 숲속으로 몸을 들이미는데 시퍼런 참, 나무가 아, 안된다 바람에도 아니 흔들려야 한다 뿌리박고 곧게 서 있을 때 너는 너인 것이다 절대로 굽히지 않는 그게 너 자신인 것이다 (그림 : 안기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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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웃는 울음시(詩)/천양희 2014. 1. 8. 18:09
집 어느 구석에서든 울고 싶은 곳이 있어야 한다 가끔씩 어느 방구석에서든 울고 싶은데도 울 곳이 없어 물 틀어놓고 물처럼 울던 때 물을 헤치고 물결처럼 흘러간 울음소리 물소리만 내도 흐느낄 울음은 유일한 나의 방패 아직도 누가 평행선에 서 있다면 서로 실컷 울지 못한 탓이다 집 어느 구석에서든 울고 싶은 곳이 있어야 한다 가끔씩 어느 방구석에서든 울고 싶을 때는 소리 없이 우는 것 말고 몸에 들어왔다 나가지 않는 울음 말고 웃는 듯 우는 울음 말고 저역 어스름 같은 긴 울음 폭포처럼 쏟아지는 울음 울음 속으로 도망가고 싶은 울음 집 구석 어디에서든 울 곳이 있어야 한다 (그림 : 윤위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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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추월산시(詩)/천양희 2014. 1. 8. 18:06
바람이 먼저 능선을 넘었습니다. 능선 아래 계곡 깊고 바위들은 오래 묵묵합니다 속 깊은 저것이 모성일까요 온갖 잡새들, 잡풀들, 피라미떼들 몰려 있습니다 어린 꽃들 함께 깔깔거리고 버들치들 여울 타고 찰랑댑니다 회화나무 그늘에 잠시 머뭅니다 누구나 머물다 떠나갑니다 사람들은 자꾸 올라가고 물소리는 자꾸 내려갑니다 내려가는 것이 저렇게 태연합니다 무등(無等)한 것이 저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누가 세울 수 있을까요 저 무량수궁 오늘은 물소리가 더 절창입니다 응달 쪽에서 자란 나무들 이 큰 재목 된다고, 우선 한소절 불러젖힙니다 자연처럼 자연스런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나는 저물기 전에 해탈교를 건너야 합니다 그걸 건넌다고 해탈할까요 바람새 날아가다 길을 바꿉니다 도리천 가는 길 너무 멀고 하늘은 넓으나 공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