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화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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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은 - 물 끝, 마음 끝에서시(詩)/이화은 2017. 11. 12. 17:31
하류! 까지 흘러가고 싶다는 내게 그대는 더 멀리 그때 그 물길 끝 일백년 전 그림 지도 한 장으로 우리도 갈 데까지 가보자 했네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그림 같은 길 따라 여기가 끝이다 강화, 자읍 십리에 꽃내 가득한데 큰 키로 앞장서 가던 한강 발바닥 굳은 살을 짠물에 담그네 한백년 젊은 느티가 몸을 숙여 한 백년 젊은 물의 맨살을 만질 때 마다 숙고사 처마처럼 강물이 구겨지네 데칼코마니 기법으로, 신식으로 무늬지고 있네 모음이 자음을 베고 눕듯 섬이 물을 베고 누웠네 우리들 문장이 물처럼 수려할 수 있다면, 매끄러운 생각을 퉁! 튕기며 본관을 묻듯 누군가 물었네 유도라는 저 섬은 흘러가는 중일까 머무는 섬인가 흐름과 머무름이 하나라는 선문답도 이 끝, 물 끝에서와서나 하는 일이네 밀고 썰고 망설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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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은 - 산나물시(詩)/이화은 2017. 7. 3. 22:00
시집 온 새댁이 산나물 이름 서른 가지 모르면 그 집 식구들 굶어 죽는다는데 ― 가죽나무 엄나무 두릅나무 오가피 참나물 참취 곰취 미역취 개미취 머위 고사리 고비 돌나물 우산나물 쇠뜨기 쇠무릎 원추리 방아풀 메꽃 모싯대 비비추 얼레지 홀아비꽃대 노루오줌 환삼덩굴 마타리 상사화 꿩의다리 윤판나물 자리공 촌수 먼 친척 같기도 한 동네 동무 같기도 한 귀에 익은 듯 낯선 이름들 가난한 가장의 착한 반려자처럼 덩그러니 밥 한 그릇 고기반찬 없는 적막한 밥상 사철 지켜 주던, 생으로 쌈 싸먹고 무쳐 먹고 국 끓여 먹고 말렸다가 나물 귀한 겨울철 묵나물 먹기도 하지만 그 성질 마냥 착하고 순하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홀로 견뎌낸 산 속 소태 같은 세월 어르고 달래어 그 외로움의 어혈을 풀어 주어야 한다 독을 다스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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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은 - 본인이 무식하여시(詩)/이화은 2017. 6. 10. 09:45
첫아이 출생 신고가 늦은 내게 동사무소 직원은 일정 금액의 벌금과 함께 사유서를 쓰라고 했다 왜 벌금을 내야 하는지 뭐라고 이유를 대야 하는지 어리둥절한 나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던 동사무소 직원이 겨우 말문을 터주었는데 - 본인이 무식하여…… 그때부터 나는 국가가 인정한 무식이 되었는데 달달한 커피 한 잔이면 하루가 행복한 나 같은 보통 아낙도 근심하고 또 근심해야 하는 무식한 국가의 백성이 되었고 악인에겐 한없이 관대하고 시리고 아픈 손은 매몰차게 뿌리치는 무식한 종교의 신도가 되었다 다시 태어나면 혼자 살꺼야 꿈같은 꿈을 꾸면서도 자식의 등을 떠미는 무식한 어미가 되었고 독자와 필자를 잠시 혼동하여 덜컥 시인이 되었으니, 이리저리 두꺼운 발바닥에 밟히고 차이는 무식한 시인이 되었으니 그 무식이 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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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은 - 쑥 캐기시(詩)/이화은 2015. 2. 10. 11:41
쪼그리고 앉아 쉬하는 자세가 가장 좋다 멀리서 보면 제 것을 들여다보는 듯, 허나 정말로 들여다 볼 필요는 없다 쑥이 다 올려다보고 있다 고로 바지보다는 통치마를 입어라 입어보면 안다 동의보감에도 나와 있다 아니 눈 먼 소녀경이던가? 적당히 자란 연애를 자르듯 칼질은 정확해야 한다 싱싱한 추억으로 국을 끓여 먹을 수도 있다 오금이 저리거든, 오금 저렸던 기억들을 한 칼 한 칼 마음에 저며라 인생 공부에 칼 같은 도움이 된다 쑥 캔 자리는 돌아보지 마라 칼잡이가 뒤를 돌아보면 이미 프로가 아니다 허리가 몹시 아플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후유증은 없다 (그림 : 김의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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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은 - 틈시(詩)/이화은 2014. 10. 22. 23:13
다만 벽을 보고 술을 마셔야 했던 그 집 건물과 건물 사이 돌아가거나 비킬 틈이 없는 틈 사이 복잡한 감정의 봉합선처럼 한 땀 한 땀 꿰매듯 순서대로 자리를 채워 앉아 면벽(面壁)하고, 면벽하고 마시는 술은 늘 비장했다 저 벽 무언가를 가르치려는 놈 앞에서 술꾼은 쉽게 분노한다 분노는 음주의 본질이기도 하니 침묵의 수위를 견디지 못해 술잔을 바람벽의 엄숙한 면상에 던지는 자도 있지만 이만한 술친구도 없다고 실금만 한 틈이라도 있으면 감쪽같이 숨어버리고 싶은 사람들이 밤이면 또 감쪽같이 스며든다 날이 밝기 전에 아물지 않은 이 도시의 수술자국이 말끔히 낫기를 흉터 없이 마침내 저 봉합선이 깨끗이 지워지고 완벽한 실종을 꿈꾸는 자들이 제발 승리하기를! 밤마다 벽은 위대한 장사꾼이었다 (그림 : 조은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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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은 - 술 받으러 가는 봄시(詩)/이화은 2014. 9. 16. 00:49
물병아리 한 마리가 딱, 반 되짜리 주전자 뚜껑만한 고것이 겁없이 봄강을 끌고 가네 꼬리물살이 풍경화 속 원근법 같기도 하고 후라쉬 비추고 가는 외로운 밤길 같기도 한데 고 뚜껑이 잠시 물 속으로 잠수라도 해버리면 강은 덩치 큰 아이처럼 철없이 길을 쏟아버리고 마는데 반 되가 턱없이 말술이 되기도 한다는 걸, 오래된 풍경화 속 원, 근, 어디쯤에 후라쉬 불빛 가까이 들이대고 보면 거기 쭈그러진 아버지 반되짜리 주전자 꽥꽥 혼자서 울고 있다네 술 받으러 가는 아이처럼 물병아리 달그락 달그락 추억 쪽으로 너무 멀리 가지 말거라 봄은 겉늙어버린 덩치만 큰 아이 같으니 (그림 : 구병규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