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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벽을 보고 술을 마셔야 했던 그 집
건물과 건물 사이
돌아가거나 비킬 틈이 없는 틈 사이
복잡한 감정의 봉합선처럼
한 땀 한 땀
꿰매듯 순서대로 자리를 채워 앉아
면벽(面壁)하고, 면벽하고 마시는 술은 늘 비장했다
저 벽
무언가를 가르치려는 놈 앞에서
술꾼은 쉽게 분노한다
분노는 음주의 본질이기도 하니
침묵의 수위를 견디지 못해 술잔을
바람벽의 엄숙한 면상에 던지는 자도 있지만
이만한 술친구도 없다고
실금만 한 틈이라도 있으면
감쪽같이 숨어버리고 싶은 사람들이
밤이면 또 감쪽같이 스며든다
날이 밝기 전에 아물지 않은 이 도시의 수술자국이
말끔히 낫기를 흉터 없이
마침내 저 봉합선이 깨끗이 지워지고
완벽한 실종을 꿈꾸는 자들이
제발 승리하기를!
밤마다 벽은 위대한 장사꾼이었다
(그림 : 조은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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