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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석 - 흰 바람벽이 있어
    시(詩)/백석 2014. 1. 8. 17:48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끊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ㅡ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나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글자들이 지나간다

    ㅡ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 가 그러하듯이

    바람벽 : 집안의 안벽

    때글은 : 오래도록 땀과 때에 절은

    쉬이고 : 잠시 머무르게 하고 쉬게 하고

    앞대 : 평안도를 벗어난 남쪽지방. 멀리 해변가

    개포 :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

    이즈막하야 : 시간이 그리 많이 흐르지 않은. 이슥한 시간이 되어서

    (그림 : 오치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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