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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텃밭을 얕봐서 앞집 트랙터나 뒷집 경운기론
반나절도 안 걸린다며 갈아주지 않는다
삯도 몇 푼밖에 받지 못하여 영 재미없겠지만
내게는 아침나절 저녁나절 나흘 일거리다
풀꽃들이 웃자라 벌써 꽃 피우고 서 있는 흙을
나는 한 삽 한 삽 떠서 제자리에 엎는다
그그저께는 한 두둑 일궈서 아욱,
그저께는 한 두둑 일궈서 시금치,
어제는 한 두둑 일궈서 열무 상추,
오늘은 한 두둑 일궈서 고추 모종,
국거리 찬거리 다 준비하고 나니 내 텃밭도 넓다
사지삭신에 흙을 부리고 나면 하늘눈이 생겨나는가
저기 산에서 여기 나무에게로 슬며시 오는 그늘이 보인다
가지에 둥지 친 새를 따라 날아다니는 나무가 보인다
언젠가 남을 비웃던 날이 내가 땅을 치고 울 날로 보인다
수년 전에 수직으로 보이던 내가 오늘은 수평으로 보인다
저녁이 올 때쯤 텃밭에 삽자루 눕히고 앉아 있으면
앞집에 트랙터가 돌아오고 뒷집에 경운기가 돌아오고
이윽고 어스름이 가득가득 찬다
나는 손 씻고 집안으로 들어가다가 본다, 내 텃밭이
날려오는 꽃잎 여러 잎을 다시 풀꽃에게로 날려보내는 걸
(그림 : 신재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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