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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오 - 열매 도둑 단풍 도둑시(詩)/하종오 2019. 10. 3. 13:04
며칠만에 돌아와 집안 둘러보니
풀들이 밟혀 작은 길 생겨나 있다
그 새로 난 작은 길 가보니
은행나무 아래서부터
감나무 아래로 가서 멎었다가
대추나무 아래로 가서 멎었다가
뒤란 둔덕까지 가서 멎어 있고
나무마다 가지에 열매 하나 없다
우리 집에는 대문이 없는데도
올해도 누가 집 뒤에 트럭 대놓고 들어와
대추와 감과 은행 싹 털어 싣고 갔다
단풍 들 무렵이면
내가 집 나가는 짓거리 알고 있는
이웃이 와서 한 짓거리 아니라면
해마다 때 잘 맞출 순 없는 법이지만
혐의를 품지 않기로 한다
나도 산천에는 대문에 없다는 걸 알고
함부로 이곳저곳 드나들며
나무들이 잎에 맺은 색깔들 눈독들여 와서
마음에 한 자리 깔았으니 피장파장 아닌가
그 새로 난 작은 길 발자국 맞춰 걸어보니
내 걸음나비와 똑같다(그림 : 신재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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