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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엽 - 어느 종착역에 대한 생각시(詩)/이지엽 2019. 8. 25. 10:47
기차를 타는 순간우리는 종착역을 생각한다
들판을 지나 강을 건너고
산과 집들을 지나
우리는 반드시 종착역에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만나고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리라
웃고 떠드는 순간 신기하게 역은 지워지고
우리는 알아채지 못한 채 역에서 멀리 떨어져 나간다
지워지는 무늬, 물속으로 가라앉는 발길들
사랑은 늘 그런 것이다
그러니 역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
물길이거나 떨어지는 꽃잎 같은 것
우리는 이미 수건으로 손을 씻었거나 밟고 지나왔다
종착역은 아마 처음 역이었을지도 모를 일
십 수 년 동안 상환해오던 전세금 융자를 다 갚거나
원수처럼 지내던 사람과 어려운 화해를 하고 눈물을 흘렸을 때
방금까지 역은 분명히 있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진다
(이 감쪽같음을 평화라 명명할 수 있을까?)
하나를 이룩해본 사람은 안다
그 역이 이미 없어지고
짐을 꾸리고 다시 무언가를 위해 허둥대야 떠나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늘 시간에 빚을 지고 달려갈 수밖에 없다
문 닫아 버린 약국을 찾아, 설렁탕집을 찾아
시간은 멀리에 가있고 역도 또한 너무 멀리에 있다
남은 생애의 첫 번째 날이 시작되면
지금까지의 것을 다 잊어버리고
표를 끊고 개찰구를 들어선다
또 다른 종착역, 실은 오래 전에 사라져버린 그것이
거기 턱 하니 버티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그림 : 김태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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