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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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돌에 대하여시(詩)/이기철 2014. 11. 23. 14:14
구르는 것이 일생인 삶도 있다 구르다가 마침내 가루가 되는 삶도 있다 가루가 되지 않고는 온몸으로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뜨겁게 살 수 있는 길이야 알몸밖에 더 있느냐 알몸으로 굴러가서 기어코 핏빛 사랑 한 번 할 수 있는 것이야 맨살밖에 더 있느냐 맨살로 굴러가도 아프지 않은 게 돌멩이밖에 더 있느냐 이 세상 모든 것, 기다리다 지친다 했는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지치지 않는 게 돌밖에 더 있느냐 빛나는 생이란 높은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치열한 삶은 가장 낮은 데 있다고 깨어져서야 비로소 삶을 완성하는 돌은 말한다 구르면서 더욱 단단해지는 삶이, 작아질수록 더욱 견고해지는 삶이 뿌리 가까이 있다고 깨어지면서 더욱 뭉쳐지는 돌은 말한다 (그림 : 이금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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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청산행시(詩)/이기철 2014. 10. 16. 17:49
손 흔들고 떠나갈 미련은 없다 며칠째 청산에 와 발을 푸니 흐리던 산길이 잘 보인다 상수리 열매를 주우며 인가(人家)를 내려다 보고 쓰다 둔 편지 구절과 버린 칫솔을 생각한다 남방(南方)으로 가다 길을 놓치고 두어 번 허우적거리는 여울물 산 아래는 때까치들이 몰려와 모든 야성(野性)을 버리고 들 가운데 순결해진다 길을 가다가 자주 뒤를 돌아보게 하는 서른 번 다져 두고 서른 번 포기했던 관습들 서쪽 마을을 바라보면 나무들의 잔 숨결처럼 가늘게 흩어지는 저녁 연기가 한 가정의 고민의 양식으로 피어오르고 생목(生木) 울타리엔 들거미줄 맨살 비비는 돌들과 함께 누워 실로 이 세상을 앓아 보지 않은 것들과 함께 잠들고 싶다. (그림 : 김성실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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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하행선 (下行線)시(詩)/이기철 2014. 5. 28. 21:48
삶의 노래는 작게 불러야 크게 들립니다 상춧단 씻는 물이 맑아서 새들은 놀을 물고 둥지로 돌아오고 나생이 잎이 돋아 두엄밭이 향기롭습니다 지은 죄도 씻고 씻으면 아카시아 꽃처럼 희게 빛납니다 먹은 쌀과 쑥갓 잎도 제 하나 목숨일 때 열매를 먹고 뿌리를 자르는 일 죄 아니겠습니까 기차도 서지 않는 간이역 지나며 오늘도 죄 한 겹 벗어 차창 밖으로 던집니다 몸 하나가 땀이고 하늘인 사람들은 땀방울이 집이고 밥이지만 삶은 천장이 너무 높아 그들은 삶을 큰 소리로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 기운 자리가 너무 커서 더 기울 수도 없는 삶을 쉰 살이라 이름 부르며 온돌 위에 눕힙니다 급히 지난 마을과 능선들은 기억 속에서는 불빛이고 잊혀지면 이슬입니다 (그림 : 임재훈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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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양포에서시(詩)/이기철 2014. 2. 20. 16:36
저 물빛같이 살 수는 없을까 아침이 활발한 물고기처럼 살 수는 없을까 떠날 것은 다 떠나 보내고 혼자 남아 있는 섬 아침마다 새로워지기 위해 빗장을 푸는 바다 말미잘들의 노래도 죄다 알아듣는 해안선 온종일 물의 손가락이 애무하는 것은 천 조각 물살뿐 거머쥔 손이 먼저 은(銀)이 되는 것은 물결뿐이다 누구라도 바다같이 사는 것은 어렵겠지만 누구라도 물살같이 사는 것은 쉬운 일이다 슬플 땐 눈시울 적시며 쟁쟁쟁 울음 울고 기쁠 땐 찰싹찰싹 물의 현을 켜며 노래 할 수 있는 것은 물살뿐이기 때문이다 파도가 없으면 생도 없다고 파고가 없으면 삶도 끓어오르지 않는다고 먼저 오는 물결이 뒤에 오는 물결에게 자리를 내어주면서 말한다 저 푸른 식욕을 보며 밥 먹고 저 푸른 산욕을 보며 손 거친 바다 여자와 눈맞추면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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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시(詩)/이기철 2014. 1. 7. 09:33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 놓아보렴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놓아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도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청하게 앉아 보렴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 우리 삶 벌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넉넉하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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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시(詩)/이기철 2013. 12. 22. 00:33
잎 넓은 저녁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더 따뜻해져야 한다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우체부처럼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 놓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을 쳐다보고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 같은 약속도 한다 이슬 속으로 어둠이 걸어 들어갈 때 하루는 또 한번의 작별이 된다 꽃송이가 뚝뚝 떨어지면 완성하는 이별 그런 이별은 숭고하다 사람들의 이별도 저러할 때 하루는 들판처럼 부유하고 한 해는 강물처럼 넉넉하다 내가 읽은 책은 모두 아름다웠다 내가 만난 사람도 모두 아름다웠다 나는 낙화만큼 희고 깨끗한 발로 하루를 건너가고 싶다 떨어져서도 향기로운 꽃잎의 말로 내 아는 사람에게 상추잎 같은 편지를 보내고 싶다 (그림 : 박용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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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가을 우체국시(詩)/이기철 2013. 12. 22. 00:32
외롭지 않으려고 길들은 우체국을 세워 놓았다 누군가가 배달해 놓은 가을이 우체국 앞에 머물 때 사람들은 저마다 수신인이 되어 가을을 받는다 우체통에 쌓이는 가을 엽서 머묾이 아름다운 발목들 은행나무 노란 그늘이 우체국을 물들이고 더운 마음에 굽혀 노랗거나 붉어진 시간들 춥지 않으려고 우체통이 빨간 옷을 입고 있다 우체통마다 나비처럼 떨어지는 엽서들 지상의 가장 더운 어휘들이 살을 맞댄다 가을의 말이 은행잎처럼 쌓이는 가을 엽서에는 주소가 없다 (그림 : 서정도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