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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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옛날의 금잔디시(詩)/이기철 2015. 5. 18. 00:44
4월이 오면 살구꽃이 피는 마을로 가야지 죽은 강아지풀들이 다시 살아 일어나고 초가(草家) 추녀 끝에 물소리가 방울 울리는 마을로 가야지 풀밭에는 어릴적 잃어 버린 구슬이 고운 숨 할딱이며 누워 있겠지 이랑에는 철 만난 완두콩이 부지런히 제 몸에 푸른 물을 들이고 잠 자던 뿌리들이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한 물 아래 내려가 물들의 가장 깊은 속살을 빨아 먹겠지 눈썹에 앵도꽃을 단 처녀애들은 작년에 넣어 둔 분홍신을 꺼내 신고 들판을 달리고 마을 사람들은 햇빛보다 먼저 일어나 간격이 고른 녹색대문(綠色大門)을 달겠지 동구길엔 비가 와도 젖지 않는 복숭아꽃이 피고 구르는 돌멩이도 부서져 제비풀의 거름이 되겠지 4월이 오면 혼자서도 외롭지 않은 옛날의 금잔디 거기 가서 휘파람 몇 가닥 남겨 두고 와야지 거기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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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마흔 살의 동화시(詩)/이기철 2015. 5. 18. 00:32
먹고 사는 일 걱정되지 않으면 나는 부는 바람 따라 길 떠나겠네 가다가 찔레꽃 향기라도 스며 오면 들판이든지 진흙 땅이든지 그 자리에 서까래 없는 띠집을 짓겠네 거기에서 어쩌다 아지랑이 같은 여자 만나면 그 여자와 푸성귀 같은 사랑 나누겠네 푸성귀 같은 사랑 익어서 보름이고 한 달이 같이 잠들면 나는 햇볕 아래 풀씨 같은 아이 하나 얻겠네 먹고 사는 일 걱정되지 않으면 나는 내 가진 부질없는 이름, 부질없는 조바심, 흔들리는 의자, 아파트 문과 복도마다 사용되는 다섯 개의 열쇠를 버리겠네 발은 수채물에 담겨도 머리는 하늘을 향해 노래하겠네 슬픔이며 외로움이며를 말하지 않는 놀 아래 울음 남기고 죽은 노루는 아름답네 숫노루 만나면 등성이서라도 새끼 배고 젖은 아랫도리 말리지 않고도 푸른 잎 속에 스스로 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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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어떤 이름시(詩)/이기철 2015. 5. 15. 13:27
어떤 이름을 부르면 마음속에 등불 켜진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나지막하고 따뜻해서 그만 거기 주저앉고 싶어진다 애린이란 그런 것이다 어떤 이름을 부르면 가슴이 저며온다 흰 종이 위에 노랑나비를 앉히고 맨발로 그를 찾아간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는 없다 연모란 그런 것이다 풀이라 부르면 풀물이, 불이라 부르면 불꽃이, 물이라 부르면 물결이 이는 이름이 있다 부르면 옷소매가 젖는 이름이 있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어떤 이름을 부르면 별이 뜨고 어떤 이름을 부르면 풀밭 위를 바람이 지나고 은장도 같은 초저녁 별이 뜬다 그리움이란 그런 것이다 부를 이름 있어, 가슴으로만 부를 이름 있어 우리의 하루는 풀잎처럼 살아 있다 (그림 : 신창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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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우리는 꿈꾸는 자시(詩)/이기철 2015. 3. 14. 20:57
찢어진 신문지 한 장 바람에 날리는 것을 보고도 나는 내 생애의 반쪽이 뒤척이는 것을 보았네 우리는 모두 꿈꾸는 자 꿈꾸면서 눈물과 쌀을 섞어 밥을 짓는 사람들이네 오늘 저녁은 서쪽 창틀에 녹이 한 겹 더 슬고 아직 재가 되지 않은 희망들은 서까래 밑에서 여린 움을 키울 것이네 붉은 신호등이 켜질 때마다 자동차들은 멎고 사람들은 하나씩 태어나고 죽네 우리는 늘 가슴 밑바닥에 불을 담은 사람들 꺼지지 않은 불이 어디 있을까마는 불 있는 동안만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네 발뒤꿈치에 못이 박여도 달려가는 것만이 우리의 숨이고 희망이네 우리는 꿈꾸는 자 눈물과 쌀을 섞어 밥을 짓는 사람들이네 (그림 : 유상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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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우리, 수채화 같은 꿈꾸면 안 될까시(詩)/이기철 2015. 2. 20. 21:21
들길 걸으면 내 발이 향기로와진다 햇빛 밝은 날은 눈 감아도 보이는 다년생 풀의 초록빛 생애 꽃들은 한 송이만 피어도 들판의 주인이 된다 그리울수록 얼굴 환해지는 풀꽃들 세상은 결코 재가 된 것 아니다 부르면 달려와 은빛 단추가 되는 삶도 있다 햇살의 매질이 아픈 지 풀잎들이 자주 종아리를 흔든다 어린 벌레들은 아직 잠깨지 않았는지 물소리가 먼저 깨어나 들판의 길을 연다 풀꽃 말고는 숲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를 아는 사람 없다 숲을 나는 새는 부리마저도 초록이다 나는 신발에 몸을 얹고 무참히도 쉰 해를 걸어왔구나 계절이 다하면 꽃들은 차례로 순교한다 나비와 벌들의 주소가 거기 있다 이제 우리 수채화 같은 꿈꾸면 안 될까 우리 한 번 시내 같은, 놀 같은 삶 꿈꾸면 안 될까 (그림 : 한천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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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내일은 영원시(詩)/이기철 2015. 2. 15. 12:33
나에게 따뜻함을 준 옷에게 나에게 편안함을 준 방에게 배고픔을 이기게 한 식탁에게 고백을 들어줄 수 있는 귀를 가진 침묵에게 나는 고마움을 전해야 한다 바느질 자국이 많은 바지에게 백 리를 데려다 준 발에게 늘 분홍을 지닌 마음에게 고단한 꿈을 누인 집에게 유언을 써본 일 없는 나무에게 늘 내부를 보여주는 꽃에게 부리로 노래를 옮겨 주는 새에게 분홍을 실어오는 물에게 나는 가난 한 벌 지어 입고 너의 이름으로 초록 위를 걸어간다 언제나 처음 오는 얼굴인 아침에게 하루치의 숨을 쉬게 하는 공기에게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주는 햇빛에게 그리고 마지막 사랑이라고 쓸 수 있는 손에게 수저를 들 때처럼 고마움 전해야 한다 손을 사용할 수 있는 힘에게 백합 한 송이를 선물하고 싶은 가슴에게 흙 위에 그의 이름을 쓸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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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시(詩)/이기철 2015. 1. 5. 17:53
내 몸은 낡은 의자처럼 주저앉아 기다렸다 병은 연인처럼 와서 적처럼 깃든다 그리움에 발 담그면 병이 된다는 것을 일찍 안 사람은 현명하다 나, 아직도 사람 그리운 병 낫지 않아 낯선 골목 헤맬 때 등신아 등신아 어깨 때리는 바람 소리 귓가에 들린다 별 돋아도 가슴 뛰지 않을 때까지 살 수 있을까 꽃잎 지고 나서 옷깃에 매달아 둘 이름 하나 있다면 아픈 날들 지나 아프지 않은 날로 가자 없던 풀들이 새로 돋고 안보이던 꽃들이 세상을 채운다 아,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삶보다는 훨씬 푸르고 생생한 생 그러나 지상의 모든 것은 한 번은 생을 떠난다 저 지붕들, 얼마나 하늘로 올라가고 싶었을까 이 흙먼지 밟고 짐승들, 병아리들 다 떠날 때까지 병을 사랑하자, 병이 생이다 그 병조차 떠나고 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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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저녁빛에 마음 베인다시(詩)/이기철 2014. 12. 8. 16:16
저 하루살이 떼들의 반란으로 하루는 저문다 나는 자줏빛으로 물든 이런 저녁을 걸어본 적 있다 강물이 잃어버린 만큼의 추억의 책장 속으로 내가 그 저녁을 데리고 지날 때마다 낮은 음색의 고동을 불며 청춘의 몇 악장이 넘겨졌다 누가 맨 처음 고독의 이름을 불렀을까 적막 한 겹으로도 달빛은 화사하고 건강한 소와 말들을 놓쳐버린 언덕으로 불만의 구름 떼들이 급히 몰려갔다 위기만큼 우리를 설레게 하는 것은 없다 깨어진 약속의 길들이 향수병을 터뜨리고 넘어진 빈 술병에는 싸구려 달빛이 담겼다 저 집들에는 몇 개의 일락과 몇 개의 고뇌와 몇 겹의 희망과 몇 겹의 비탄이 섞여 있다 거실에서는 덧없는 연속극들이 주부들의 시간을 빼앗고 이제 어디에도 고민하며 살았던 시인의 생애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 시간은 언제나 뭉텅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