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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저녁빛에 마음 베인다시(詩)/이기철 2014. 12. 8. 16:16
저 하루살이 떼들의 반란으로 하루는 저문다
나는 자줏빛으로 물든 이런 저녁을 걸어본 적 있다
강물이 잃어버린 만큼의 추억의 책장 속으로
내가 그 저녁을 데리고 지날 때마다
낮은 음색의 고동을 불며 청춘의 몇 악장이 넘겨졌다
누가 맨 처음 고독의 이름을 불렀을까
적막 한 겹으로도 달빛은 화사하고
건강한 소와 말들을 놓쳐버린 언덕으로
불만의 구름 떼들이 급히 몰려갔다
위기만큼 우리를 설레게 하는 것은 없다
깨어진 약속의 길들이 향수병을 터뜨리고
넘어진 빈 술병에는 싸구려 달빛이 담겼다
저 집들에는 몇 개의 일락과 몇 개의 고뇌와
몇 겹의 희망과 몇 겹의 비탄이 섞여 있다
거실에서는 덧없는 연속극들이 주부들의 시간을 빼앗고
이제 어디에도 고민하며 살았던 시인의 생애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
시간은 언제나 뭉텅뭉텅 가슴속의 추억을 베어낸다
그것마저 이제는 아무도 슬픔이라 말하지 않는다
어린 새가 공포로 잠드는 도시의 나뭇가지 위로
놀은 어제의 옷을 입고 몰려오고
나는 자줏빛으로 물든 이런 저녁을 걸어본 적 있다
어둠 속에서도 끝없이 고개 드는 사금파리들
그 빛 한 움큼만으로도 언덕의 길들은 빛나고
그런 헐값의 밤 속에서 호주머니 속 수첩에 기록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결코 길들일 수 없었던 통증의 저녁도 순한 아이처럼 길든다
아픈 시대처럼, 말을 담고도 침묵하는 책장처럼(그림 : 박락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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