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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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밥상시(詩)/이기철 2021. 1. 31. 17:33
산 자(者)들이여, 이 세상 소리 가운데 밥상 위에 놓이는 수저 소리보다 아름다운 것이 또 있겠는가 아침마다 사람들은 문 밖에서 깨어나 풀잎들에게 맡겨둔 햇볕을 되찾아 오지만 이미 초록이 마셔버린 오전의 햇살을 빼앗을 수 없어 아낙들은 끼니마다 도마 위에 풀뿌리를 자른다 청과(靑果) 시장에 쏟아진 여름이 다발로 묶여와 풋나물 무치는 주부들의 손에서 베어지는 여름 채근(採根)의 저 아름다운 살생(殺生)으로 사람들은 오늘도 저녁으로 걸어가고 푸른 시금치 몇 잎으로 싱싱해진 밤을 아이들 이름 불러 처마 아래 눕힌다 아무것도 탓하지 않고 전신(全身)을 내려놓은 빗방울처럼 주홍빛 가슴을 지닌 사람에게는 미완(未完)이 슬픔이 될 순 없다 산 자(者)들이여, 이 세상 소리 가운데 밥 솥에 물 끓는 소리보다 아름다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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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작은 것을 위하여시(詩)/이기철 2020. 11. 9. 22:29
굴뚝새들은 조그맣게 산다. 강아지풀 속이나 탱자나무숲 속에 살면서도 그들은 즐겁고 물여뀌 잎새 위에서도 그들은 깃을 묻고 잠들 줄 안다. 작은 빗방울 일부러 피하지 않고 숯더미 같은 것도 부리로 쪼으며 발톱으로 어루만진다. 인가에서 울려오는 차임벨 소리에 놀란 눈을 뜨고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에 가슴은 떨리지만 밤과 느릅나무 잎새와 어둠 속의 별빛을 바라보며 그들은 조용한 화해와 순응의 하룻밤을 새우고 짧은 꿈속에 저들의 생애의 몇 토막 이야기를 묻는다. 아카시아꽃을 떨어뜨리고 불어온 바람이 깃털 속에 박히고 박하꽃 피운 바람이 부리 끝에 와 머무는 밤에도 그들의 하루는 어둠 속에서 깨어나 또 다른 날빛을 맞으며 가을로 간다 여름이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들녘 끝에 개비름꽃 한 점 피웠다 지우듯이 가을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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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그늘은 나무의 생각이다시(詩)/이기철 2020. 10. 24. 19:48
나무의 생각이 그늘을 만든다 그늘을 넓히고 좁히는 것은 나무의 생각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잡아당겨도 나무는 나무가 벋고 싶은 곳으로 가서 그늘을 만든다 그늘은 일하다가 쉬는 나무의 자리다 길을 아는가 물으면 대답하지 않고 가고 싶은 곳으로만 가서 제 지닌 만큼의 자유를 심으면서 나무는 가지와 잎의 생각을 따라 그늘을 만든다 수피 속으로 난 길은 숨은 길이어서 나무는 나무 혼자만 걸어 다니는 길을 안다 가지가 펴놓은 수평 아래 아이들이 와서 놀면 나무는 잎을 내려 보내 아이들과 함께 논다 가로와 세로로 짜 늘인 넓은 그늘 그늘은 나무의 생각이다 (그림 : 양익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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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목백일홍 옛집시(詩)/이기철 2019. 12. 17. 17:35
연필을 놔두고 나온 것 같다 빨랫줄에 걸린 수건에는 지나가던 소식들이 자주 걸렸다 늘 정직하기만 한 과꽃과의 이별 내가 떠나는데도 눈빛이 맑던 쟁반 피부가 하얀 접시 깨어지면서도 음악이 되던 보시기 마음을 접고 펴던 살 부러진 우산 화요일과 목요일의 날개에 아무 차이가 없는 나비 자고 나면 새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나무 나쁜 이파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집을 나는 신던 신발을 신고 너무 멀리 걸어나왔다 나 없어 혼자 놀다가는 사금파리에 담긴 정오 목백일홍은 전화를 못 받아서 안부를 물을 수도 없는 지금 (그림 : 류건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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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천 송이 꽃에도 나비는 외로우니시(詩)/이기철 2019. 8. 7. 12:59
유구를 아느냐 운문산이 물으면 비슬산 구절초가 나 대신 대답한다 이 산 기슭에도 나려선국(羅麗鮮國) 이 치차처럼 차례로지나갔으니 돌아보면 만 리 길 노을은 붉고 지금은 오산천(川)에 좋이 씻은 진흙 신 내 본시 소엽도 후강도 못 익혀 율려 없는 시 한 줄 구름에 띄우며 굴참나무 잎그늘 아래 놀러오는 청령호접이나 기다리리 낙산에 해 저물면 밤이슬은 차고 홑이불 끌어 덮는 수잠은 여려 바람이 부쳐 오는 편지는 수 십 타래 천 송이 꽃에도 나비는 외롭고 성근 울바자 아래 맨드라미만 붉어 연지새 싸라기로 울면 엉클어진 생각은 갈래갈래 수백 결 머리칼만 만지고 떠난 해그늘일모(日暮) 스무 해 유구 : 아득하게 오래된 나려선국(羅麗鮮國) : 신라 고려 조선 대한민국 치차(齒次) : 나이의 순서 소엽 : 고악곡의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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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전주(全州) 한옥 길시(詩)/이기철 2019. 3. 5. 20:07
풀이파리 같은 옛 노래 한 소절 자드락길섶에 봉숭아꽃으로 피어있는 곳 바다까진 못 간 햇살이 사금파리에 담겨 초록을 물고 눈 시리게 반짝이는 곳 처마 아래 제비꽃모종 옮겨놓고 호미 씻는 이들이 천 년 전 백제말로 인사를 나누는 곳 짚세기 걸음에도 발길마다 노래가 묻어있어 아쟁소리에 맞춰 허밍하고 싶은 곳 그곳에 사금파리 반주께 소꿉살림 차려놓고 오늘 하루만 너와 나 신랑각시놀이 하는 열두 살이 되고 싶어라 오랜만에, 실로 오랜만에, 오십 년 전 처음 써 본 연서 못다 쓴 마지막 구절 하나 마저 쓰고 싶어라 부칠 데 없는 그 편지 강물에나 띄우며 종이배 흘러가는 끝끝까지 영화 속 소년처럼 따라가고 싶어라 따라가다 길 놓치고 싶어라, 영영 돌아오지 않고 싶어라 가깝고도 먼 완산, 내 할버지의 본향, 전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