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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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고등어시(詩)/이기철 2018. 8. 30. 23:25
새로 사 온 등 푸른 고등어를 보면 나에게도 저렇게 등이 푸른 때가 있었을까 만 이랑 물결 속에서 대웅전 짓는 목수의 대팻밥처럼 벌떡벌떡 아가미를 일으키던 고등어 고등어가 가보지 않은 바다는 없었으리라 고등어가 가면 다른 고기들이 일제히 하모니카 소리를 내며 마중 나왔으리라 고등어가 뛸 때 바다가 펄떡펄떡 살아나서 물의 뺨을 철썩철썩 때렸으리라 푸른 물이랑이 때리지 않았으면 등이 저렇게 시퍼렇게 멍들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나에게는 흔한 일이지만 그래, 바다의 치맛자락이 만 겹이었다고 아직도 입을 벌리고 소리 치는 고등어 고등어가 아니면 누가 바다를 끌고 이 누추한 식탁까지 와서 동해의 넓이로 울컥울컥 푸른 바다를 쏟아놓을 수 있을까 (그림 : 진종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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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나비의 여행시(詩)/이기철 2018. 8. 30. 23:21
여린 생이 여린 생을 끌고 간다 생에 한 번뿐일 저 채색의 눈물겨운 외출 영원의 모습은 저런 것일까 슬픔의 목록 위에 생을 얹어놓고 가는 돌아서면 길 잃고 말 저 슬픈 여행 꽃술의 달콤함을 알았다면 너도 필생을 다한 것이다 몇 올 그물 무늬와 부챗살의 날개로 작은 색실 풀어 허공을 물들이며 해당 분매 망초의 키를 넘어 나비는 난다 저 아지랑이 같은 비상에도 우화는 분명 아픔이었을 것이다 잠들지 말아라, 생이 길지 않다 그 날개 아래, 꽃그늘 아래 들판의 유순함은 너로 인함이다 너에게 바치기 위해 나는 지순이란 말을 아껴왔다 햇살과 물방울과 나비와 가벼움으로 이루는 저기 고결한 생 바라보기에도 눈부신 슬프고 고요한 나비의 여행 (그림 : 김기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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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저물어 그리워지는 것들시(詩)/이기철 2018. 8. 12. 18:01
나는 이 세상을 스무 번 사랑하고 스무 번 미워했다 누군들 헌 옷이 된 생을 다림질하고 싶지 않은 사람 있으랴 유독 나한테만 칭얼대는 생 돌멩이는 더 작아지고 싶어서 몸을 구르고 새들은 나뭇잎의 건반을 두드리며 귀소한다 오늘도 나는 내가 데리고 가야 할 하루를 세수시키고 햇볕에 잘 말린 옷을 갈아입힌다 어둠이 나무 그림자를 끌고 산 뒤로 사라질 때 저녁 밥 짓는 사람의 맨발이 아름답다 개울물이 필통 여는 소리를 내면 갑자기 부엌들이 소란해진다 나는 저녁만큼 어두워져서는 안된다 남은 날 나는 또 한 번 세상을 미워할는지 아니면 어제보다 더 사랑할는지 (그림 : 박락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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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아름다운 사람시(詩)/이기철 2018. 7. 25. 12:15
이 세상 아름다운 사람은 모두 제 몸 속에 아름다운 하나씩의 아이를 갖는다 사과나무가 햇볕 아래서 마침내 달고 시원한 사과를 달 듯이 이 세상 아름다운 사람은 모두 제 몸 속에 저를 닮은 하나씩의 아이를 갖는다 그들이 가꾸어온 장롱 속의 향기가 몰래 장롱 속을 바져나와 잠든 그들의 머리카락과 목덜미와 목화송이같은 아랫배로 스며들어 이 세상 아름다운 사람은 이 세상의 크기에 알맞는 하나씩의 아이를 갖는다 그들이 가꾸고 싶은 세상은 아침숲처럼 신선한 기운으로 충만하다 그가 담그는 술은 길이 향기롭고 그의 치마는 햇볕 아래 서면 호랑나비가 되어 하늘로 날아간다 그의 어깨는 좁아도 그의 등 뒤에는 언제나 한 남자가 누울 휴식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아름다운 사람은 제 몸 속의 샘물로 한 남자를 적시고 세상의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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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마음 속 푸른 이름시(詩)/이기철 2018. 7. 25. 12:13
아직 이르구나 내 이 지상의 햇빛, 지상의 바람 녹슬었다고 슬퍼하는것은, 아직 이르구나, 내 사람들의 마음 모두 잿빛이 되었다고 탄식하는 것은 수평으로 나는 흰 새의 날개에 내려앉는 저 모본단 같은 구름장과 우단 같은 바람 앞에 제 키를 세우는 상수리나무들 꿈꾸는 유리 강물, 햇볕 한 웅큼씩 베어 문 나생이 잎새들 마음 열고 바라보면 아직도 이 세상 늙지 않아 외출할 때 돌아와 부를 노래만은 언제나 문고리에 매어 둔다 이제 조그맣게 속삭여도 되리라 내일 아침에는 이 봄에 못 피었던 수제비꽃 한 송이 길 옆에 피고 수제비꽃 옆에 어제까지 없던 우체국이 하나 새로 지어질 것이라고, 내 귓속말로 전해도 되리라 오늘 태어나는 아이가 내일 아침에는 주홍신을 신고 우체국을 갈 것이라고 (그림 : 정덕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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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풀들의 사회생활시(詩)/이기철 2018. 6. 22. 10:06
풀들의 사회생활은 바람과 햇빛이다. 생성의 삶은 물색 옷을 자주 바꾼다. 떨켜는 꽃송이가 살던 자리 머묾이 안식일 수는 없다고 꽃들이 서둘러 봄을 벗고 여름으로 바꿔 입는다. 꽃은 별이 아닌데 별꽃이라 부르는 것은 나의 사치 온종일 꽃빛을 번역했으나 점염은 흰종이를 물들이지 않는다. 꽃들의 꿈이 아홉 겹이라도 한 겹 바람에 지나니 염려의 손으로 햇빛이 계절을 바느질한다. 오전은 속옷 속에 감춰주었던 종달새를 모본단 하늘로 날려 보내고 요절이어서 더 고혹인 꽃의 몸짓을 나는 못 배우고 나비가 배운다. 갈망과 유혹 사이로 난 작은 길을 걸어 아름다움 제조법을 익히느라 늦은 나무들 슬픔을 배우기 전에 기쁨을 먼저 배운 풀들. 점염(漸染) : 차차 번져서 물듦 모본단(慕本緞) : 날실과 씨실이 배합되어 문양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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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봄아, 넌 올해 몇 살이냐시(詩)/이기철 2018. 3. 17. 09:49
나무 사이에 봄이 놀러 왔다 엄마가 없어 마음이 놓이지 않는 눈치다 내년에도 입히려고 처음 사 입힌 옷이 좀 큰가 새로 신은 신발이 헐거운가 봄은 오늘 처음 학교 온 일 학년짜리 같다 오줌이 마려운데 화장실이 어딘지 모르는 얼굴이다 면발 굵은 국수 가락 같은 바람이 얘의 머리카락을 만진다 여덟까지 세고 그 다음 숫자를 모르는 표정이다 이슬에 아랫도리를 씻고 있네 저 아찔한 맨발 나는 아무래도 얘의 아빠는 못 되고 자꾸 벗겨지는 신발을 따라다니며 신겨주는 누나는 되어야겠다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 울음이 먼저 나올 것 같은 봄아, 넌 올 해 몇 살이냐 (그림 : 안기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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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말시(詩)/이기철 2017. 10. 31. 09:30
이 한 마디 말의 등을 타고 나는 그대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그대 마음속 등불로 피어오른 복사꽃 향내를 맡고 싶습니다 이 한 마디 말의 귀를 타고 나는 그대의 가슴속으로 들어가 즈믄 해를 강물로 흐르는 그대 마음의 여울물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묵은 상처에 새 살 돋고 메밀 싹에 첫 햇살 내리는 아침이면 굳게 잠긴 빗장을 열고 그대 빛나는 유리의 말들을 듣겠읍니다 그대 마을 열명길에 오리나무 꽃잎 피고 쏟아지는 햇빛의 분수들 지상의 건반을 흔들 때 지붕의 기와들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고 창마다 커튼들은 깊이 여민 속치마를 벗을 것입니다 그대 마음의 얼음덩이 녹을 때까지 백리를 걸어도 안 아픈 말의 발을 딛고 상처나지 않은 몸으로 나는 그대에게 가고 싶습니다. 그대 마음속 깊이 묻힌 씨앗 트는 소리 들릴 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