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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사랑의 기억시(詩)/이기철 2022. 1. 15. 13:40
시집 한 권 살 돈이 없어 온종일 헌책방 돌 때 있었네
남문 시장 고서점, 시청 옆 헌책방 돌 때 있었네
하루에 서른 편 키 큰 서가 아래 지팡이처럼 서서 읽을 때 있었네
모두들 서럽고 쓸쓸한 말로 시의 베를 짜고 있었네
귀에는 벌 떼 잉잉거리고 눈시울엔 안개비 촉촉이 서렸었네
어쩌다 맘에 드는 시 한 편 만나면 발길 돌리지 못하고
꽃술의 꿀벌처럼 뱅뱅거리다가
주인 눈살 피해 서너 번 문을 여닫을 때 있었네
더러는 노트 조각 찢어 열 줄 시를 베꼈네
주인 몰래 책장을 찢고도 싶었으나, 이게 시인데 시는 아름다운 것인데
나를 달래며 내일 또 오지, 모래 또 오지
문을 밀고 나올 때 있었네
그때마다 엷은 등에는 시구들이 고딕으로 찍혔었네
시집 이름 기억 안 나도 머릿속에 베껴 논 시구 선명해
내일 또 와 베낄 거라고
문을 밀고 나오는 발등에 뜨거운 것이 툭- 하고 떨어졌네
머리카락 위로 낙엽이 시가 되어 내려앉았네
사랑이 깊었던 날들이었네
지금도 너 어디 있느냐 묻고 싶은 날들이었네
달려가 와락 끌어안고 싶은 날들이었네
(그림 : 이형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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