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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 - 은행나무 배꼽시(詩)/정양 2014. 7. 7. 10:20
마재마을 날망에는
세 아름도 넘는 은행나무가 서 있는데요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 뿌리가
집집마다 골고루 뻗어 있다고 믿는데요
은행나무 아랫두리에는 예전에
사람 들어앉아 잠을 잘 만큼
커다란 구멍이 하나 있었답니다
과거에 낙방하여 낙향하던 어떤 나그네가
그 구멍 안에서 한나절이나 잠을 잔 뒤에
구멍 안쪽에 시를 한 수 써 놓고는
들 건너 찰뫼산 모퉁이를 감아흐르는
부용강물에 그만 몸을 던졌더랍니다
그런 연유로 사람들이 그 구멍을 꺼려해서인지
구멍도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다는데요
사람들 배꼽 높이만큼 파인 그 구멍을
사람들은 은행나무 배꼽이라 했고
위아래로 째져 보여서 아이들은 그냥
은행나무 보지라고도 불렀습니다
구멍이 점점 좁아졌다지만 내 어렸을 때만 해도
어깨나 허리에 감고 다니던 책보 여남은 개씩은
그 구멍 안에 쑤셔넣기도 했고
어떤 때는 사람들 눈을 피하여 분풀이하듯
그 안에다 다투어 오줌을 싸지르기도 했는데요
아마 내가 중학교 다니던 무렵이었지요?
그 구멍 안을 들여다본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나그네의 절명시가
문득문득 궁금했었던 게지요
구멍 안쪽에는 쭈그러든 나뭇결 사이사이에
무슨 부적처럼 보이는 흐린 붓 자국들이
손전등 불빛에 어른거려 보이곤 했는데요
내가 대학 다니던 때만 해도 그 구멍이
손바닥 하나쯤 겨우 드나들게는 좁았는데요
이제는 나무껍질만 세월 따라 부풀어
그 구멍을 영영 가두고 말았습니다
은행나무 우람한 몸집 안에는 지금도
배꼽으로 삼킨 세월이 텅 빈 채 갇혀서
절명시라도 읊어내는지 신음소린지
무슨 힘을 쓰는 소린지 깊은 밤이면
어쩌다 한 번씩 머언 우레처럼
우웅우웅 우루웅 울어대곤 한답니다날망(명사) : 마루(등성이를 이루는 지붕이나 산 따위의 꼭대기)의 전라도 말
(그림 : 김병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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