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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산길에서 풀 뜯는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내 또래쯤 되는 것 같다
백초즙(百草汁)을 담그려고
풀을 뜯는다고 한다
콩알 백개 헤아려 품에 넣고
풀 한무더기 뜯을 때마다 쉼표처럼
콩알 하나씩 그 자리에 놓으면서
품안에 콩알 다 없어질 때까지
나무 풀이나 보이는 대로 뜯는다는데
풀 한가지에 한 소쿠리씩 백 소쿠리를
항아리에 삭혀 우려낸 그 백초즙이
묵은 해소도 가슴애피도 소갈증도
몰매 맞은 삭신도 다 풀려버리는
명약 중의 명약이라는데
이렇게 아무 풀이나 뜯다가
독초라도 섞이면 어떡하냐고 했더니
못난 사람 못된 사람 다 소용 닿듯이
맛만 보아도 대번에 숨이 넘어가는
소문난 독초들이 섞여야 더 약이 된다며
나를 돌아보며 확인하듯 할머니는
두어 번이나 고개를 끄덕인다
못난 풀 못된 풀 모진 풀
짓밟아도 뜯어내도 다시 돋는
모질고 모진 꿈들아
할머니의 풀짐을 메고 화끈거리며
할머니의 굽은 등을 따라간다
못난 풀 못된 풀 다 소용에 닿는,
아무 풀이든 한데 섞이어
명약이 되는 그 이치가 풀짐보다 더 무겁다
(그림 : 김대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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