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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양 - 백초즙
    시(詩)/정양 2016. 4. 9. 21:51

     

     

    초여름 산길에서 풀 뜯는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내 또래쯤 되는 것 같다

    백초즙(百草汁)을 담그려고

    풀을 뜯는다고 한다

     

    콩알 백개 헤아려 품에 넣고

    풀 한무더기 뜯을 때마다 쉼표처럼

    콩알 하나씩 그 자리에 놓으면서

    품안에 콩알 다 없어질 때까지

    나무 풀이나 보이는 대로 뜯는다는데

     

    풀 한가지에 한 소쿠리씩 백 소쿠리를

    항아리에 삭혀 우려낸 그 백초즙이

    묵은 해소도 가슴애피도 소갈증도

    몰매 맞은 삭신도 다 풀려버리는

    명약 중의 명약이라는데

     

    이렇게 아무 풀이나 뜯다가

    독초라도 섞이면 어떡하냐고 했더니

    못난 사람 못된 사람 다 소용 닿듯이

    맛만 보아도 대번에 숨이 넘어가는

    소문난 독초들이 섞여야 더 약이 된다며

    나를 돌아보며 확인하듯 할머니는

    두어 번이나 고개를 끄덕인다

     

    못난 풀 못된 풀 모진 풀

    짓밟아도 뜯어내도 다시 돋는

    모질고 모진 꿈들아

     

    할머니의 풀짐을 메고 화끈거리며

    할머니의 굽은 등을 따라간다

    못난 풀 못된 풀 다 소용에 닿는,

    아무 풀이든 한데 섞이어

    명약이 되는 그 이치가 풀짐보다 더 무겁다

    (그림 : 김대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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