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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영 - 수건을 말리며시(詩)/문정영 2020. 4. 2. 08:20
수건 한 장, 한 장에는 기념의 글자들 있다
처음 새겼던 날들의 마음 바래고 바래어
이제 글자는 희미해지고 받침 몇 개는 올이 풀려 있다
그 순간의 기억 몇 자락만 몇 백 번 씻기고 닦여
하늘로 풀풀 나풀거린다
어머니 칠순의 글자들 지워질 무렵, 내 얼굴에도
주름 몇 개가 잡힌다
마음으로 천 만 번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글자들
주름 안에 있다 그러나 그 글자들 읽지 못하고
자꾸 지워지는 것들에 눈길 둔다
흰 바탕에 푸른 글자들 하늘로 풀풀 나풀거리는 것에
마음 둔다
닦아주지 못하고 목이 아픈 날들마저 싸안지 못하여도,
널려 있는 것만으로도 족한 것이 있다
세상 따뜻한 것들을 닦아낸 뒤에 햇빛 알갱이들
가득 품고 있는 것으로 족한 것이 있다
내 마음, 내 눈물도 자꾸 닦고 싶던 낡은 수건 한 장
내 안에 다시 걸어둔다(그림 : 심성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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