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문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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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영 - 버팀목시(詩)/문정영 2014. 5. 12. 14:48
1. 내 몸 속에 언제부터 촘촘히 박혀 있었을까 저 버팀목들은, 괴여 있던 시간들을 지나치게 의식한다 하나씩 밑동이 뽑히는, 한낮에 웅성거리던 지식의 기둥은 부질없는 탑이었다 쌓여서 커다란 소원을 기도하더니 조각조각 부서져 내린다 이제 내가 손쓸 수 없는 지점에서 손떼 묻은 버팀목들은 횡으로 떠내려간다 2. 창살의 문을 올리고 공원으로 새들이 날아간다 비로소 날개를 갖게 되는 검은 나무들도 펄럭인다 새들이 돌아온 나무는 혼자서도 숲을 이루어 바람을 쉬어 가게 한다 더 이상 버팀목이 없어도 동구만이 의자 하나를 비워 주는 나무의 그림자 (그림 : 김은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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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영 - 가슴속에 등불을 켜면시(詩)/문정영 2014. 5. 12. 14:47
가슴속에 등불을 켜고 보면 저만큼 지나가 버린 사람의 뒷모습도 아름답다 젊음의 서투른 젓가락질 사이로 빠져나간 생각들이 접시에 다시 담기고 사랑니 뺀 빰처럼 부풀어 오른 한낮의 취기도 딱딱한 거리를 훈훈하게 한다 나무들도 나처럼 한 잔의 술로 등불을 켜는 것일까 겨울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여윈 저들의 어깨가 지나친 사람의 뒷모습처럼 아름답다 한때 와디가 흐르지 않는 사막처럼 모래성이 쌓이던. 씹히지 않던 일상도 생각의 양쪽 어금니를 사용하면 잘게 부셔져 소화된다 입 속을 행구워낸 한 모금의 수돗물로도 입내 음이 향기롭다 가슴속에 등불을 켜고 보면 스쳐 지나간 사람의 옛모습도 종이학처럼 적게 접힌다 (그림 : 김종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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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영 - 붕어빵의 꿈시(詩)/문정영 2014. 5. 12. 14:44
생존과 동시에 식어가는 붕어빵 몇 개를 봉지 채 호주머니에 넣었다 아직 굳지 않은, 고개를 살짝 내밀던 붕어들이 허기진 마음 속으로 펄쩍 뛰어 들었다 뱃속의 익은 팥알갱이들이 따낸 내장처럼 꿈틀거렸다 겨울가뭄에 날카로워진 지느러미가 심장의 동맥들을 세차게 후려쳤다 준척이었다 심줄이 팽팽하게 섰다 관절은 뼈들을 조미면서 힘겨루기를 했다 가슴 밑바닥에서 긴 꼬리가 퍼드덕 거렸다 뜰채로 허리를 낚아 채자 희번덕이던 수직으로 섰던 욕망들이 한순간 벗겨졌다 아, 너의 몸에서 이미 퇴화된 은비늘의 선명한 자국들만 눈 내리는 거리에 즐비할 뿐, 난로불 위에서 자전하면서 갈구하던 세상들은 식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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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영 - 아버지를 쓰다시(詩)/문정영 2014. 5. 12. 01:23
아버지는 집 앞 강물로 쓰면 싱겁고 한낮의 햇빛으로 지우면 파랬다 이른 저녁이면 뜨거워진 공기가 은어들처럼 파닥거렸다 아버지는 조용히 흔들리는 물결을 2층 옥상에서 바라 보셨다 가문 날에 아버지를 부르면 독한 담배 냄새가 났다 어린 나는 아버지와 익숙해지지 못했다 아버지를 배워 아버지가 되었으나 그 사이 강가의 돌멩이들은 혼자 머무는 법을 익히기도 했다 아버지는 얼굴이 검었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아버지를 닮았다고 했다 아버지와 몸이 닿아도 아픈 곳이 먼저 닿았다 초봄에 붉은 저녁이 걸려 있던 오동나무를 잘라냈다 잘린 밑동에서 자라는 새잎처럼 나는 키가 커갔다 누군가를 가려줄 수 있도록 넓어지라고 하셨으나 마음은 금이 간 사기그릇처럼 소심했다 아버지는 거름을 준 텃밭의 단감나무였다 무언가를 더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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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영 - 듣는다는 것시(詩)/문정영 2014. 3. 1. 21:05
비고인 곳은 낮은 자리다 높은 곳은 마르고 낮은 곳은 젖는다 고여 있는 뒤안길 걸어가면서 나는 조각하늘과 나무눈과 지는 꽃잎 이야기를 듣는다 고인다는 것은 말하는 것이 아니다 듣는다는 것이다 쉴 새 없이 쏟아지던 빗소리 담가 두면 어느 사이 잔잔해진다 그때 들으면 비의 음절 하나하나가 보인다 본다는 것도 듣는다는 것이다 비가 묻혀온 세상 듣는 것이다 하늘이 내는 소리도 거기 속한다 나무나 꽃도 낮은 자리에서 들으면 들린다 길도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듣는다 (그림 : 이신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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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영 - 우산도독시(詩)/문정영 2014. 2. 19. 12:05
내가 가졌던 딱 하나 우산 잃어버린 후 내 안의 우산꽂이에 다른 우산 꽂지 않았다 비만 오면 나는 온몸으로 비를 받아들였다 한 땀 한 땀 살갗 속으로 파고드는 비 찔레꽃 가시에 꽂혀 흐르는 비 햇빛 쨍쨍한 날에도 비는 멈추지 않았고 그 잃어버린 우산 하나 내 기억 속에서 여우비처럼 멀어져갈 때 7월 어느 모임에서 나는 반짝이는 우산 하나 발견했다 마음이 흔들렸다 모임 끝나고 가장 먼저 그곳 빠져나오며 새하얀 우산 하나 옆구리에 꽂고 나왔다 그녀가 내 안에 꽂힌 날이었다 (그림 : 황규백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