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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 그래, 그래, 그 잎시(詩)/허수경 2015. 8. 21. 21:11
그 잎 여릴 적, 우리 만나 잎 따서 삶아 밥해주던
할머니집에 앉아 여린 잎에 하얀 밥 싸 먹으며 벙그러
지는 입술 오무리며 깔깔거리다가 어머 어머 할머니
설거지 많겠네, 어쩌나, 그때 그 잎 여려 할머니의 아
가 같은 손힘으로도 뚝 뚝 꺾이는 것을,
그 잎 커다랗게 자라 그늘 만들고 그늘 아래 비 그
으며 수박 오이가 익는 것 들을 때까지 기다리자, 하며
할머니가 떠 오는 설거지물에 마치 오랜 시간 씻듯 양
은 밥주발 씻으며 할머니가 잎 옆에 달린 꽃 머리에 꽂
으며 벙그렇게 웃는 것 보며 그래, 그래 저 잎 더 무성
해져서
산 덮고 그 산, 잎그늘 아래 축축한 땅의 수줍은 곳
열어 버섯 돋아오르면 그때 또 할머니가 지어주는 버섯
밥 먹자, 좋겠네, 저 잎 여릴 때 만나 무성하게 산그늘 될
때가지 붙어 있다가 그래 그래 할머니 머리에 꽂힌 저 붉
은 꽃 좀 봐, 무슨 열대 섬 사는 아씨 같은 할머니 좀 봐,
그때까지 설거지 물에 담긴 양은 주발 새로운 시간처럼
씻으며, 그래 그래, 저 잎
(그림 : 최정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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